권영해 증언의 배경과 신뢰성
1. 배경 김영삼의 대통령 임기는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까지였습니다. 권영해의 안기부장 임기는 1994년 12월 24일부터 1998년 3월 3일까지였습니다. 김영삼은 전두환을 1995년 12월 3일에 구속했습니다. 일단 구속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전두환에게 씌울 범죄사실을 만들어내야 할 위치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 당시 안기부장 권영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홍준표와 권정달을 동원해 1996.1.4.일, 삼정호텔 1110호에서 전두환에게 집권시나리오가 있었다는 허위사실을 생산해냈습니다. 이처럼 권영해는 전두환을 죽이고, 김영삼을 살려야만 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2024. 6.17일, 권영해는 안기부가 북한에 공작원을 보내, 광주에서 사망한 490명의 명단을 가져왔다고 스카이데일리에 증언하였습니다. 이름, 출생일, 출생지, 계급, 소속부대 등이 기재된 490명의 명단은 적장의 서랍에 잠겨져 있는 최상의 비밀문건입니다. 미 CIA나 이스라엘의 모사드도 아닌 국정원이 적장의 서랍 속에 잠겨져 있는 극비문서를 몇 명의 공작원을 보내 꺼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 역시 1980-81년 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해 봐서 국정원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설사 그런 명단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해도 그는 명단을 숨겨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 명단이 발표되면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영웅이 되고, 김영삼과 권영해가 감옥에 가야 할 입장이었는데,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공작원을 적극적으로 북한에 보내겠습니까? 그런 명단은 가져올 수도 없고, 설령 가져왔다 해도 꼭꼭 숨겨야만 그와 그의 주군 김영삼이 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5.18의 진실을 팔 이유가 없었습니다.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그가 적극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5.18의 진실을 밝혀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490명의 사망자 명단은 권영해가 공작원을 북으로 보내서 획득해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490명 명단은 황장엽이 망명 선물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황장엽은 거물입니다. 거물이 다른 나라에 망명을 하려면 그 나라에 줄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490명 명단은 황장엽이 망명의 선물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당시 황장엽의 직책은 대남비서였고, 다남비서라면 490명 명단을 충분히 수중에 넣을 수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황장엽이 망명한 날짜는 1997.2.12.일입니다. 2개월 후인 1997.4.17.일에는 전두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황장엽은 그 명단을 권영해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 명단을 받아 들었을 권영해, 그 즉시 명단을 밝히겠습니까? 밝히면 전두환이 영웅이 되고 김영삼과 권영해가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더구나 2개월 후에는 전두환의 죄가 대법원에서 확정됩니다. 그 명단은 권영해에 의해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영해가 받은 명단은 1997년 2월, 황장엽이 망명한 바로 그 시점에서 미국 정보당국이 한국으로 날아와 황장엽을 조사했을 때 미 정보 당국으로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미국 정보당국이 가지고 있을 그 정보도 머지않아 비밀해제 되어 공개될 것입니다. 그러면 권영해는 왜 꽁꽁 감춰왔던 그 비밀을 2024.6.20.일과 2024.7.8.일 2회에 걸쳐 스카이데일리에 전격 공개했겠습니까? 2017년 초, 권영해는 교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저를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저의 주장을 황당하다고 내몰았던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냐, 안기부장 아니냐, 지만원이 누구냐, 지만원은 공명심이 높아 헛소리를 한다. 북한의 고정간첩 50-60명은 광주사태에 개입했을 수 있다. 그런데 600명이 말이 되느냐?” 이렇게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7년 후에 갑자기 마음이 변해 북한군 490명이 광주에서 사살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정신이 병들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7년 전의 권영해와 7년 후의 권영해가 왜 바뀌게 되었는지, 불과 며칠 전에 논리적인 실마리가 잡혔습니다. 권영해는 정신적으로 병들지 않았습니다. 2024.7.2.경 서울에서 방위산업 관련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넓은 공간에 넉넉하게 놓여진 한 테이블에 권영해와 미 CIA 한국지부장인 박 모씨가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때 미 CIA한국지부장이 권영해에게 주의를 주는 대화가 어느 한 기자에 의해 녹음되었습니다. “2024.6.20.일에 보도된 그 내용은 원장님께서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못마땅하다고 힐난하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화내용이 의문을 푸는 열쇠였습니다. 아래는 이로부터 도출한 저의 논리적 시나리오입니다. 490명 명단은 권영해도 가지고 있고, 황장엽을 직접 취조한 미CIA 본부도, CIA 한국지부장 박 모씨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➀ 만일 가까운 미래에 미CIA가 그 명단을 비밀 해제하여 공표할 경우, 이것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은 권영해는 어떤 입장에 서게 될까요? 권영해는 매우 중요한 국가정보를 끝까지 감추어온 매국노가 되어 온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장면을 모면하려고 미 CIA가 공개하기 전에 선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국가를 배신하지 않았다~’ ➁ 그러면 미 CIA 한국지부장은 어째서 오랜 파트너로 절친한 어른에게 대놓고 힐난조의 돌직구를 날렸을까요? 머지않은 장래에 미CIA가 490명 명단 관련 정보를 공개하게 되면 그 신선도가 떨어져 한국의 수많은 지인들에게 한국지부장의 역할이 평가절하되어, 자신의 존재가 센세이셔널하게 부각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미CIA의 한국지부장 박 모씨는 부친이 외대 교수입니다. 카추사 신분으로부터 발탁된 노력형 수재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시민권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인들의 발판이 매우 넓습니다. 이 두 인물의 입장을 대조시켜 보니, 490명에 대한 정보는 권영해와 미 CIA가 공유한 정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490명에 대한 신뢰가 확실해 집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되니, 490명에 대한 미CIA의 정보도 곧 공개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신뢰성 490명이 광주에서 사망했고, 그들의 제삿날이 모두 1980.6.19.로 통일돼 있다는 정보는 다른 정보들과 서로 어울립니다. 저는 앞에서 475명이 광주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기록물이 3개 있고, 1980년 바로 그해에 북한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기록영화에서도 흥분된 어조로 내레이트 돼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15명(490-475)은 광주에서 중상을 입고 북으로 가서, 한 사람씩 죽어가, 1980.6.19.일에 모두 죽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북한에서 불리는 [무등산의 진달래] 가사에는 통일을 위해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떼죽음) 당한 북의 자식들이 무등산의 진달래가 되어 해마다 피어난다는 단장의 표현이 있습니다. 북한군이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가 왕창 한 순간에 떼죽음을 당했다는 증오와 슬픔이 함께 용해된 가사입니다. 미 CIA보고서에는 5.18을 주도한 핵심세력은 550여명의 극렬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은 광주인들을 끌고 가 인민재판을 열고, 즉결처형 시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현장 사진들에는 도저히 광주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무장조직, 지휘체계와 분업체계가 시스템적으로 갖추어진 조직의 사진들이 수십 장 있습니다. 이들의 수만 세어도 수백 명에 이릅니다. 결론적으로 권영해의 490명은 그야말로 A급 정보에 속하며, 이는 법관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정보가 절대 아닙니다. 도대체 법관들이 무슨 자격과 무슨 종류의 전문실력으로 이런 정보를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인지, 허탈해집니다. 2026.8.13.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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