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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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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 멤버·토론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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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실 전도사 지만원 박사의 칼럼을 공유합니다 www.systemclub.co.kr

삼촌
삼촌•14시간 전

5.18영웅 박남선을 집단살해혐의로 고발한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확정판결내용: 박남선과 지용이 집단살인 지휘자들 대한민국 대법원은 2023.1.12. 광주가 나를 상대로 고소한 5.18관련사건 1-2심 판결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간단한 표현으로 나에게 2년 실형을 확정했다. 2심 판사는 장윤선-김예영-장성학이고, 사건번호는 서울중앙지법 2020노804. 판결일은 2022.2.16.이었다. 이 사건에서 대한민국 사법부는 71광수를 박남선이라고 확정판결했고, 73광수를 광주인 지용이라고 확정판결했다. 노담(노숙자담요)은 71광수를 황장엽이라고 감정했고, 73광수를 인민군 대장 오극렬이라고 감정했다. 노담의 감정에는 논리와 증명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사법부에는 논리도 증명도 없었다. 수학적 알고리즘이 현실화되고 있는 안면인식 과학세계에서 안면인식 과학의 문외한인 판사들이 안면인식 과학자의 감정 내용을 권력으로 유린한 것이다. 권력으로 유린했다는 사실은 이후에 연속되어오는 또 다른 사건들의 재판과정에서 정정당당히 증명하고 있다. 막가파 세상일수록 저들의 죄상을 관찰해야 대한민국 사법부의 막무가내식 판결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모든 증거, 모든 논리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가슴을 조금도 울리지 못했다. 대한민국 판사들은 모두 김일성 종교의 신봉자들이고, 막가파의 대명사인 이재명의 아바타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고 대한민국을 부활시킬 활로가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암흑이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지옥인 것이다. 모든 애국자들이 [재선거], [부장선거]를 외치며 거리로 나와 수고하는 동안 나는 민주당의 뿌리인 [5.18]이 세기적이고도 세계적인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입증-현현시키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다. 그 마지막 수단이 바로 박남선과 지용을 집단살인죄 혐의로 고발하는 것이다. 미CIA, 현장사진, 보도매체가 공동입증한 집단살인 사실 광주 현장 사진에는 1980.5.23.에 도청 안팎에서 촬영된 사진들이 매우 많다. 900여 명의 민간인 집단들이다. 모든 정황증거들을 결합해 보면 이들 900여명의 민간집단은 광주인이 아니라 북한인들이다. 이런 분석이 사실에 부합하느냐에 대한 여부를 따질 이유도 없는 4매의 현장사진이 두드러져 있다. 광주사람 4명이 무장괴한 34명에 의해 도청으로 연행해 가는 사진들이다. 미CIA보고서는 이들이 극렬분자들로부터 인민재판을 받고 즉결 처형당했다고 기재했다. 노담은 이들 4명이 해남농민회원 김인태, 광주 학원교사 김중식 등이라고 판독했고, 이들이 도청 안에서 처형당했다고 판독했지만, 법관들은 이를 새카맣게 무시했다. 그런데 2024. 보도매체 [뉴스와논단]이 노담의 판독내용이 사실임을 추적했다. 이로써 박남선과 지용이 포함된 무장 괴한 34명은 광주사람 4명을 집단으로 살해한 집단살인조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졌다. 사진상에 나타난 71광수는 집단살인조의 우두머리이고, 73광수는 부-우두머리로 보인다. 박남선과 지용이 집단살인조 34명의 우두머리와 부-우두머리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이 34명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광주-전라인 4명을 무단 살해한 지휘자라는 사실이 대한민국 사법부에 의해 확정판결된 사람들이다. 살인죄의 공소시효 경과 이 두 사람을 개인자격의 살인자로 고발할 경우 살인 일자가 1980년이라 2015년에 제정된 [태완이법]에 의하더라도 소급입법 문제로 즉시 기각될 수밖에 없다. 1995년 12월에 제정된 「헌정 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 구세주 그래서 5.18특별법과 동시에 1995년에 입법화된 「헌정 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 법률의 제3조 2항에는 “「형법」 제250조의 죄로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규정된 집단살해에 해당하는 범죄” 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아래와 같다. https://law.go.kr/trtyInfoP.do?trtySeq=2256 박남선과 지용은 34명을 이끌고 호남인(광주-전라인) 집단의 일부인 [4명+알파]명에 해당하는 집단을 무단 살해한 지휘자들이다. 바로 이 법률에 근거해 나는 곧 박남선과 지용을 고발할 것이다. 2026.6.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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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12일 전

사전투표 독려자들의 불가사의

사전투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첫째는 사전투표 결과가 통계수학 이론을 정면으로 파괴해왔다는 사실이다. 투표인 수는 천만(10.000.000) 단위로 10의 7제곱(10의 7승)규모다. 이 정도 숫자는 통계학에서 대수(large number)라고 표현된다. 통계학에는 [대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이라는 것이 있다. 투표자 수가 천만인 경우 사전투표와 본선투표와의 차이(편차:variance)는 1/n제곱이다. 투표자 수가 천만 단위(10의 7제곱, 7승)이면 본투표와 사전투표 사이의 오차는 0.000000000000001으로 사실상 제로다. 수학이론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사전투표가 도입되고부터는 늘 사전투표가 본투표의 결과를 뒤집어 버렸다. 통계학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100% 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개표시스템의 문제다. 전자개표기는 운용자의 마음에 따라 작동한다. 이 세상 시스템 중에 100%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인간의 개입이 없는 전자개표기는 없다. 인간의 개입이 있으면 그 개표기는 운용자의 양심에 따라 투표결과를 내놓는다. 이런 전자개표기를 믿으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기이고, 전자개표기를 운영하는 선관위의 양심을 믿으라는 것도 그 자체로 사기다. 이 세상에서 양심이 100% 깨끗하다는 전제하에서 개발된 시스템은 없다. 양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객관성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이 나라 국민의 양심이 모두 깨끗하다면 이 나라에 범죄자가 단 1명도 없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투개표 시스템을 믿으라는 것, 그것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감시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정부, 개표 시스템을 믿지 못하겠다고 당연한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을 감옥에 넣겠다고 협박하는 정부는 이 자체로 사기꾼 정부다. 나는 통계수학에서 수학공식과 수학정리 8개를 발명한 통계수학자다. 아울러 나는 [시스템]이 무엇인지 모르던 1993년, 이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은행객장의 순번대기 번호표] 시스템을 흔들어 보이면서 시스템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두 가지 학문 영역에서 과학으로 단언할 수 있다. 나는 2003년 초, 노무현이 이회창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 대해 불신감을 가졌고, 그래서 2003년 노무현 당선 무효소송에 앞장섰었다. 내가 앞장서면서부터 [헌변](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이 법정투쟁을 도맡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제기하면서 [선거 스스템을 개선하자]고 나서야 할 야당 정치인들이 사전투표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이 심히 기이하고 한심하다. 사전투표 독려하는 우익들이 좌익보다 더 위험 요사이 박근혜가 선거운동에 나섰지만, [사전투표]를 강조하고 있다. 윤석열이 통곡하는 우익들의 애절한 읍소를 외면하고 [사전투표]를 역설했다. 윤석열이 여소야대 정국을 만든 것은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장동혁이 사전선거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힘당 중진 대부분이 사전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이들은 참으로 괴이한 사람들이다. 학습하는 자세도 두뇌도 없는 외골수들이다. 이들이 바로 우익을 분열시키는 청맹과니들이다. 2026.5.2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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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13일 전

우익이 사전투표하면 선거 망한다!

장동혁,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지 않으려면 무엇하러 광주에 갔나? 5.18이 민주당의 무소불위 마패인줄 뻔히 알면서 왜 국힘단 지휘부 총동원해 광주에 갔나? 지휘자는 선이 굵어야 한다 그렇게 선이 가늘어서야 누가 따라주겠나 미CIA 보고서와 권영해 증언에 의하면 광주는 북한군 490명이 광주에 와서 전사하면서 싸운 게릴라전이었다. 그런데 광주와 전라도와 빨갱이들은 이것을 광주의 껌팔이들이 국민 모두를 위해 피 흘려 성취한 거룩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사기를 쳤다. 5.18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은 나와 재판을 하고 있는 5.18기념재단, 광주시청, 광주판사들이 법적 [준비서면]을 통해 이미 다 알고 있다.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빨갱이들은 5.18이 마치 절대자의 마패나 되는 것처럼 군림하면서 국민들이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악용해 치졸한 스타벅스 게임을 벌이고 있다. 아래에 그 진실을 짧게 요약한다. 1980.5.23. 전남도청에는 광주인 4명을 무단 연행해다가 인민재판 열고 즉결 처형한 무장 살인조 34명이 있었다. 광주판사들은 [광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기 편결을 내렸다. 살인조 우두머리와 부-우두머리가 북한인이 아니라 광주인 박남선과 지용이라고 사기-협잡성 판결을 한 것이다. 이제 광주는 법원에서 답해야 한다. 살인조 34명이 광주인인지 북한인인지 밝히지 못하고 박남선과 지용을 살인혐의로 처벌하지 못하면 5.18은 세계적 세기적 대 사기극이 된다. 광주가 이 외통수에서 탈출할 확률은 제로다. 2026.5.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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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15일 전

박정희 미니 평전

한일협정과 박정희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 할까봐 사용과정을 감시했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 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상수도 확장(40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청탁을 차단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일제 공간의 조선왕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1905년 7월 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당시 조선을 일본이 먹지 않고 러시아나 중국이 먹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족이 되었고, 조선족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왕 먹힐 바에야 일본에게 먹힌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와 중국은 일본인들보다 더 잔악하게 욕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일제 치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선악 구별이 반듯하고 도덕심이 강했다. 일본인 교사들 중에는 나쁜 이들도 있었지만 존경을 받는 교사들도 많았다. 5,000년 역사! 9,000여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었다. 5.16과 박정희에 대한 세계지도자들의 평가 키신저: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러시아가 동시에 하려다 붕괴되지 않았나.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구한 혁명이 5개다. 일본의 명치유신, 터키의 게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한국의 박정희다. 이중 경제기적을 이룩한 혁명은 오직 5.16이다. 엘빈토플러(제3의 물결):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는 그 나라 수준에 맞게 제한돼야 한다. 이를 놓고 독재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 모델은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다. 폴케네디(강대국의 흥망):박정희는 세계 최빈국의 나라를 불과 20년만에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키웠다. 푸틴: 박대통령에 관한 책은 다 구해 달라. 그는 나의 모델이다. 아이젠하워: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주의 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콴유: 박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말레지아의 마하티르 전 총리와 캄보디아 훈센총리도 박대통령 추종자로 유명하다. 등소평:박정희는 나의 멘토다. 후진타오:나는 새마을 운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 김정일:옛날에는 유신이다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새마을운동 덕에 경제가 성장한 건 사실 아니냐. 서울은 도쿄보다 더 훌륭한 도시로 조선의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5.16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눟는 환경 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해방 이래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 나마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 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사기꾼 같았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5.16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19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은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써클을 두었고, 당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고 욕을 하면서 고속도로 작업 현장에 가서 드러누웠다.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었다. 김대중! 금강산 사업, 평양체육관 건설, 자동차공장 건설 등 합법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5조에 가까운 국가재산을 퍼주었고, 국민 몰래 5억 달러 이상의 군자금을 적장에게 바쳤으며, 자신은 아방궁을 지어놓고 호화롭게 살았다. 이런 자에게 당시의 청구자금이 갔다면 김대중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참으로 아찔해진다. 박정희! 진해 별장에서 기자들에게 허리띠를 보여주었다. 나긋나긋하게 얇아져있는 허리띠였다. 모든 기자들이 숙연해 했다.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가 도둑이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도둑일 것이다. 누구든 박정희를 도둑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댐과 동시에, 그 자신의 도덕성부터 공개해야 할 것이다. 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5.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기능학교들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됐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 호소했다. 박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sunset items)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기술자료(TDP)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릎 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도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초라하지만 집 이름이 ‘영빈관’이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의 대통령들에게는 과학이 입으로만 중요했다. 국가경영능력만을 보면 박대통령은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누가 비하해도 박정희는 이미 세계적 인물로 우뚝 서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있다. 반면,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를 보자.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금을 배급해 주었다. 들에 가서 풀을 뽑고 코스모스를 심으면서 절반 이상을 놀다가 오면 하루에 22,000원을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벤다며 소주 마시고 낯 잠을 자다 오면 37,000원씩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니까 이들은 공장이나 들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는 사실상 일자리 죽이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무너진 기업 수는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김대중은 기업죽이기의 명수였다. 시쳇말로 쨉이도 안 되는 매국-빨갱이 정치꾼이 배우지 못한 무리들을 이끌고 박정희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 “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 값을 의미했다. 주고받는 것은 손 벽이 마주쳐야 한다.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제로 전투기를 만들고, 항공모함을 만들어 미국에 대적했을 때까지도, 조선은 손바닥만한 창경궁에서 서로 모함하고 모략하면서 싸움질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건설한 철로와 도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끄덕 없이 공고하게 유지되는 교량과 터널, 항만, 발전소, 비행장을 당시의 위정자들이 건설할 수 있었을까?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의 조선을 자치 능력이 없는 나라, 현대적인 법률과 행정기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미개국이라며 일본에 통치권을 허용해 주었다. 일본인들 역시 자기들이 아니었으면 한국의 개화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 국민의 고혈을 짰다고 하지만 일본 총독부가 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이 자본을 투자했다. 조선왕조의 능력으로는 총독부건물, 화신, 신신, 반도 등 당시 최대규모의 건물들도 지을 수 없었고, 더구나 항만, 철로, 발전소,도로 등을 건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전 후 일본은 그들이 이룩해 놓았던 모든 자산들을 고스란히 두고 갔다. 이것이 일본의 귀속자선(vested property) 23억 달러다. 이 23억 달러는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했을 때의 대한민국 총자산의 80%였다. 일본이 북한에 놓고 간 자산이 26억 알러, skagksa에 놓ㄹ고 간 자선이 23억 달러였다. 이 많은 자산을 놓고 간 것도 억울하다면서 일본은 왜 또 1965년에 한국에 8억 달러를 주었는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욱박질렀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박정희를 성토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 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지 않을 것이한 한다.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자존심이다. 자존심도 모르는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 영혼에 때가 묻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세계 도처에서 멸시를 받고 있으며, 유독 대한민국의 시계만 거꾸로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 국교가 정상화되고, 박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포항제철에 들어 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 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질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함량미달들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9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제조업을 생각해 보자. 눈에 보이는 비용은 불과 몇 개에 불과하다. 재료비, 인건비, 보증수리비, 검사비, 하자수리비, 테스트비, 재작업량, 반품 및 폐품처리비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비용들이다. 그러나 장부에 잡히는 이런 비용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더욱 크다. 단지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말없이 발길을 돌리는 고객으로부터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무식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설계변경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설계시간이 많이 걸려서 시기를 잃는 경우의 비용이 그런 이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기계고장으로 발생되는 비용, 근로자가 자존심을 잃음으로써 발생되는 비용이 장부에 기록돼 있는가? 복잡한 행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비용, 애매한 목표와 기준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행정의 복잡성과 무능 그리고 행정 지연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직장 내의 불쾌감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하청업체를 과도하게 경쟁시킴으로써 발생되는 비용, 비생산적인 회의로부터 발생되는 기회비용 등이 회계장부에 잡히는 비용인가? 무능한 경영인들은 눈에 보이는 비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유능한 경영자의 눈에는 수면 하에서 보이지 않고 유발되는 비용이 더 크게 보인다. 신중을 기한다고 행정을 미루고 있는 동안 경쟁업체는 새로운 제품을 가지고 시장을 누빈다. 이런 비용은 회계 장부에 없고 그래서 비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일협정으로부터 들어온 이익 역시 이러한 식으로 무능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많이 받아내자고 떼를 쓰고 있는 동안 한국을 지지했던 미국의 마음이 식상해질 수도 있으며,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기회만 놓치고 시간만 허송한다. 만일 더 기다렸다가 그 배상금을 김대중이 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가다렸다가 그 후의 다른 대통령들이 받았다면 그들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자기들도 뜯어가고 집행과정에서 온갖 세도가와 사기꾼들이 달려들어 줄줄이 새어나갔을 것이다. 고쳐야 할 한국인의 정신: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자 덴마크! 인구는 겨우 500만, 국토는 한국의 5분의 1, 땅은 모래밭과 황무지, 그러나 지금은 국민소득 33,000달러의 선진국이다. 1813년부터 나폴레온과 독일의 침략을 받아 곤궁할 대로 곤궁해진 터에 또 다시 영국과의 7년 전쟁을 치르면서 넓고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겼고 남은 것은 노약자와 부녀자뿐이었다. 절망이었다. 일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때에 나타난 [그룬트비히]가 정신적 혁명을 일으켰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국민 정신이 바뀌자 국가가 바뀌었다. 한국인 졸부가 일본 최고의 호텔에 머물면서 최고로 비싼 그림 한 점을 배달시켰다. 배달원은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포장지에 약간의 자국을 가리켰다. 싸고 또 싼 것이라 그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포장도 상품으로 취급한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금전적 보상은 얼마든지 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 한국인에게 순간적인 욕심이 발동했다. 그림 값에 버금가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배달원은 그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나갔다. 영악해 보이는 한국인, 그 영악해 보이는 것만큼 한국 사람들이 잘 사는가? 어수룩해 보이는 일본인, 그 어수룩한 것만큼 일본인들이 못사는가? 일본인은 아픈 것만큼 자기관리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인은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을 것이다. 밖에서 많이 얻으면 얻은 것만큼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안에서 얻은 것이 밖에서 얻는 것보다 많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인 역사학자를 친구로 한 적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미국 증권시장 부회장으로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부친이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려 했다. 그는 거절했다.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은그릇을 나눠주려 했다. 또 거절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걸 받으면 자식의 정신이 병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으면 그 후 제가 아무리 더 많은 것을 보태도 그건 제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스스로 이루어 보겠습니다". 전후에 일본인들은 미국을 무작정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거지처럼 공장 문 밖을 기웃거렸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미국인들은 그런 일본인들을 멸시했다. "일본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미국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문을 활짝 열고 다 보여줘라". 1962년 당시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수많은 군중을 향해 미국의 우월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은 기술 측면에서 영원히 미국과 경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매우 훌륭한 손수건과 훌륭한 파자마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을 미국에 수출하려 하지 않습니까?". 미국 공장을 기웃거리는 꼴사나운 정경을 멸시하는 연설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의 모든 생산기지가 미국에 있었고, 세계의 신제품은 모두가 "MADE IN U.S.A" 였다. 미국인들의 우월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만들어 지지 않은 모든 제품을 쓰레기처럼 경시했다. 이를 NIH 증후군(Not Invented Here Syndrome)이라고 불렀니다. 이러한 모욕을 무릅쓰고 일본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선생님을 불러들이고 미국을 견학하면서 미국을 모방하려 애썼다. "미국을 모방하자" 영어로는 "Copy the West"가 당시 일본인들의 목표였다. 일단 모방한 다음에 그들의 목표는 "미국을 따라잡자" 영어로는 "Catch up with the West"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거꾸로 미국이 일본을 배우려고 팔을 걷었다. 그 결과 1982년 즉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조롱 섞인 연설 이후 20년만에 승용차에 대한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일본 승용차가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 차는 겨우 7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일본을 정말로 증오하는 사람은 일본을 배워 일본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일본의 배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제발, 이제는 더 이상 치사해지지 말고 체신을 지키고, 겸손한 작세로 배우려는 자세와 매너를 가졌으면 한다. 2026.5.2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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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17일 전

입법-사법-행정 기관이 총동원하여 5.18학설 죽이기

(위헌법률 심판 청구신청서 중에서) 5.18성역화의 호위무사 역할은 ⓵ 광주시 ⓶ 5.18기념재단 ⓷ 광주변호사회 ⓸ 광주법관 등이 연합하여 수행합니다. 이 호위무사 집단의 공격목표는 신청인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신청인의 학설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도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대한민국 입법기관인 국회는 2019년에 [5.18진상규명법]을 제정하고 그 3조 9항에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 침투조작” 여부를 규명하라는 명령을 적시하였습니다. 신청인이 한 굮가의 입법 목표가 된 것입니다. 이 법률에 의해 구성된 [5.18진상조사위원회]가 당시 대통령에 의해 구성되었고, 광주시민으로 구성된 107명의 조사위가 2019.12.부터 4년에 걸쳐 519억 원의 국가예산을 사용하면서 보고서를 발행하였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신청인의 이름이 명기돼 있고, 신청인이 저술한 이 사건 도서 [5.18작전 북한이 수행한 결정적 증거 42개]의 제목이 명기돼 있고, 이 저서 내용이 집중적으로 탄핵돼 있습니다. 신청인의 저서가 국회와 행정부의 공식적인 공격목표가 된 것입니다. 5.18조사위원회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고, 학력이 공개되지 않은 광주시민 100여명을 임시-공무원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1급으로부터 9급에 이르는 임시공무원 직분을 부여하였습니다. 신청인이 저서에 수록한 42개 증거 전체에 흐르는 ‘전체적 맥락’을 파괴하기 위해, 42개 증거 중 미CIA 보고서,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증언 등 중요한 증거들은 기피하고, 책에 명시돼 있는 42개 중거 중, 극히 일부만을 뽑아, 살라미 식으로 잘라, 낱개 항목을 체크리스트로 전환하고, 각 체크리스트에 대해 임시직 공무원들로 하여금 OX를 치도록 하는 비학술적 방법으로 한 학자가 22년에 걸쳐 연구한 학술서를 불온문서로 낙인찍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요로에 배포하였습니다. 한 개의 학설을 공격하기 위해 한 국가의 국회가 입법을 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가 광주사람 100여명을 뽑아 그들에게 1급으로부터 9급에 이르는 임시공무원직급을 부여한 후, 그들로 하여금 한 학자의 학설을 비-학술적인 방법으로 탄핵하는 무식-무도한 행위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취할 수 있는 방식인 것인지 심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가가 조폭수준으로 추락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청인은 1993년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무질서했던 은행객장에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을 설치하니까 질서가 향상되었고, 의식도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화두로 이 나라에 시스템 이론을 처음으로 계몽했던 시스템 학자입니다. 시스템 학자인 신청인은 민주주의를 시스템적 시각으로 정의하였습니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하는 정치시스템이다.”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혜를 창출해내려면 자유로운 공론의 시장이 존재해야 하고, 공론의 장이 얼마나 발달돼 있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질과 격이 달라진다는 것이 신청인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구동하는 기본 엔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식 잣대를 적용한다면 하나의 학설은 다른 학설에 의해 도전받고, 자유시장 경쟁원칙에 의해 공론의 공간에서 그 우열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청인의 학설에 도전하는 학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월권하여 학문분야를 침범하였습니다. 지금의 이 국가가 국가기관들을 총동원하여 국가권력으로 하나의 학설을 도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국격을 추락시키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 국가의 처사가 합헌인 것인지 심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26.5.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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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팜•홍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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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20일 전

지만원이 죽으면 5.18이 산다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이 고사되고 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는 한 게시물 당 조회수가 1만-2만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내가 출소하니 게시물 당 조회수가 3백 명 내외다 해킹이 있는지는 몰라도 어떤 글에는 조회 수보다 추천수가 더 많은 경우도 있다 나와 사회와의 소통수단은 오로지 내 홈페이지뿐이다 그런데 [네이버]는 내 홈페이지를 막아놓았다. [네이버]와 소송을 하려 해도 이제는 여력이 없다 5.18과의 소송, 탈북자들의 소송에 대응하기에도 벅차다 내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길은 구글에서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을 입력하는 방법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찌 사회와 교통할 수 있을 것이며 교통이 없으면 5.18과의 전쟁은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전쟁터의 장수는 격려로 시기를 얻는다 그런데 내게는 격려가 없다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이 진정한 애국자들이라면 5.18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만이라도 시스템클럽의 존재를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구글]에서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검색하기를 열심히 전파-선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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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20일 전

좌익에 당한 억울함, 우익에 당한 서운함

내가 좌익으로부터 당한 억울함은 공격의 억울함이었다. 내가 우익으로부터 당한 억울함은 무시와 경멸의 억울함이었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5.18만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해방 전후의 역사를 참으로 많이 공부했다 나는 자부한다. 내가 쓴 4.3역사책 [지워지지 않는 오욕의 붉은 역사 제주 4.3 반란사건]이 최상의 4.3 역사책이라고. 4.3 역사를 가장 정확히 영화로 부각시키려면 내 역사관과 역사지식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김덕영 감독은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역사 장면의 A구역을 클로즈업 시켜야 하는데 엉뚱한 B구역을 조명했다. 나는 김구의 역사를 매우 잘 안다. 그를 김일성에게 데려간 간첩 성시백의 김구 사냥 역사를 잘 안다. 김구(본명 김창수)가 북한 역사책에서 어떻게 정의돼 있고, 북한 영화에서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 아주 잘 안다. 한마디로 김구는 인간 이하의 잡놈이다. 이런 김구를 위대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왜 역사적 인물로 띄워주셨는지 그것이 매우 아쉽다. 나는 제3의 애국적 영화감독이 꼭 나를 찾아와 내 이야기를 참고하여 새로운 4.3영화를 제작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덕영, 권순도가 이니더라도 새로운 정신을 가진 감독이 나를 찾아주었으면 한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나는 5.18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빨갱이들에게 빼앗긴 해방전후사의 역사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많은 현대사를 연구했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4.3 영화와 현대사 영화를 만든다면, 빨갱이에 빼앗긴 역사를 다시 찾아올 확률이 99%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익의 역사는 남사당 문화인 감성의 역사였다. 우익의 역사는 수학의 역사여야 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역사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인물들을 찾아, 내게 연결시켜주시기 바란다. 나는 이런 일로 단돈 10원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데도 나는 우익으로부터 도외시당하고 있다. 2026.5.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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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24일 전

광주는 5.18 딜레마 어떻게 풀까?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영원할까? 광주는 5.18 정치세력으로 등극하여 민주화의 귀족으로 군림해왔다. 5.18마패만 들면 대통령도 헌법도 그 밑을 기었다. 5.18은 이 나라에서 정치력으로 또는 사법 권력으로 누룰 수 없는 특수 철옹성이었다. 미CIA가 북한개입을 증명했다 해도 무시, 국가최고 정부기관의 수장이었단 사람이 증언해도 무시, 북한판 CIA를 관장하는 대남 총비서가 증언했다 해도 무시, 군 상황일지와 검찰보고서와 남북한 기관의 문서에 활자화돼 있다 해도 무시,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사진을 보여주어도 무시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전무했다. 이번 5.18에도 정치세력은 광주로 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것이고, 전국의 예술공간에서는 5.18을 성역으로 굳히기 위한 감성적 창작물이 봇물을 이룰 것이다. 이에 반해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을 전라도의 노예신세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애국자들은 별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난공불락의 5.18성역, 사실상 붕괴 그런데! 하늘이 갑자기 이변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1980.5.23. 도청을 장악한 세력은 광주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도청에는 900여명의 남녀노소 민간인들이 도청 안팎을 점령하여 거대한 장례행사를 질서정연한 통제 하에 치렀다. 어쩌다가 멋모르고 민간인 그룹 속에 들어갔단 광주사람이 정보 프락치로 오해되어 도청 안으로 끌려가 즉결처형을 당했다. 이 사실은 사진으로 증명이 되었고, 미CIA보고서로도 증명되었다. 끌려간 이 4명은 당시 사망했다. 이 사망사실은 노숙자담요에 이어 [뉴스와논단]에 의해 확인되었다. 광주인 4명을 도청으로 끌고 간 체포조는 사진에 34명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34명이 광주인이 아니라면 북한인이다. 34명이 광주인이라고 밝히지 못하면, 34명은 북한인이어야 하고, 그러면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것이 된다. 광주인 34명이 광주인 4명을 인민재판해서 처형했다는 판결 그런데 광주시, 광주단체, 광주법관들이 야합하여 자기발등을 찍었다. 노숙자담요(노담)는 34명의 우두머리 71광수를 황장엽이라고 판독했는데 광주 판사들은 71광수를 5.18영웅이라는 박남선이라고 판결했다. 부조장으로 보이는 73광수를 노담은 인민군 대장 오극렬이라고 판독했는데, 광주판사들은 무명인 ‘지용’이라고 판결했다. 광주판사들이 34명 살인체포조의 우두머리와 부-우두머리를 광주인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로써 게임은 끝났다. 34명 살인 체포조를 지휘한 박남선과 지용을 살인죄로 처벌해야만 했는데 광주는 이 두 사람조차 살인혐의로 재판하지 않은 것이다. 5.20. 함평경찰관 4명을 버스로 깔아 죽인 배용주는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34명 살인 체포조를 지휘했다는 박남선과 지용은 지금도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 이 두 사람을 살인혐의로 재판에 넘기지 않는 한, 34명은 북한인이다. 그리고 광주판사들은 사기-협잡성 판결을 한 것이 된다. 광주는 지금 외통수 올무에 걸려들어 남아 있는 나의 재판에서 이 문제가 전투적으로 다퉈질 것이다. 종전에서처럼 법관들이 건너뛰기식 회피성 판결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34명의 살인-체포조 조장인 71광수 박남선과 부조장인 73광수 지용을 재판에 넘기지 않는 한, 5.18민주화는 북한군의 화려한 군사적 성과를 광주 양아치들의 위대한 업적으로 둔갑시킨 세계적인 대 코미디 사기극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지금 광주는 부산하게 움직일 것이다. 이제까지 세도를 부려오던 광주가 다윗의 돌멩이에 맞아 골리앗처럼 쓰러지는 모습을 온 국민이 구경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 사실을 나는 전단지를 만들어 많은 애국인들에게 돌리고 있지만, 호응하는 이들이 없다. “지만원, 너 혼자 해봐라.” 2026.5.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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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개월 전

위헌법률심판 청구서 초안을 마치며

위헌법률심판청구 소송을 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이 법률을 저촉했다며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본인이 직접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재판이 걸려 있는 담당 판사를 통해서만 제기할 수 있다. 담당 판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이 소송을 거부하면 법관기피신청도 할 수 있다. 필자가 이 위헌법률심판 청구서 내용을 준비한 것은 여러 달 전이지만 시간을 두고 작성하다보니 청구서 내용의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폐기하기를 여러 차례 했다. 아는 내용을 목적 지향적으로 정리라는 것이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많은 이들은 헌법소원(위헌법률심판청구) 내용을 일반론으로 작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일반론을 넘어 구체적 증거들을 가지고 5.18특별법 8조1항의 위헌성을 지적하였다. 구체적 증거는 [북한군 개입]에 대한 증거이고, 북한군 개입 표현을 억압하려는 광주와 법관들이 공동하여 범한 법-왜곡죄 혐의를 증거로 제시했다. 사실자료에 대한 학자의 해석을 법관들의 해석으로 제압하려는 법관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 위헌이라는 점도 부각시켰다. 판사라고 해서 함부로 학자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과연 얼마나 많은 법조인들이 동의할까? 이 초안은 가까운 기간 내에 당해 법원에 제출될 것이다. 2026.5.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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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개월 전

5.18 역사의 성격 (헌법소원)

위 헌 법 률 심 판 제 청 신 청 신청 취지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8조1항은 헌법 제11조 평등권, 제21조 표현의 자유, 헌법제22조 학문 예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결정을 구합니다. 신청대상의 법률: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8조1항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8조(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 금지) 1항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방법으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신문, 잡지, 방송, 그밖에 출판물 또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제1항제1호에 따른 정보통신망의 이용 2. 전시물 또는 공연물의 전시·게시 또는 상영 3. 그밖에 공연히 진행한 토론회, 간담회, 기자회견, 집회, 가두연설 등에서의 발언“이라고 규정돼 있습니다. 재판과의 관련성; 2025고단4493 신청인은 현재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8조1항에 의해 기소되었고, 사건은 2025고단4493호로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계류돼 있습니다. 위 볍률 조항이 위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1. 5.18역사는 당사자가 살아 있는 이해충돌 당대사로 어제의 충신과 역적이 오늘 뒤바뀌는 정치사건 5.18은 충돌의 역사이고 충돌의 당사자들이 생존해있는 당대사(contemporary history)입니다. 당사자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1981.1.23.의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의 내란사건으로 규정했고, 1997.4.17.의 대법원은 제심과정 없이 5.18을 재심하여 전두환의 내란사건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이조시대에 노론과 소론이 득세에 따라 역사를 바꾸어 썼듯이 5.18역사를 포함한 한국의 소요사건들 역시 정치 세력에 따라 성격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1980년부터 1995년까지 15년 동안 국민은 5.18을 김대중의 내란사건이라고 인식해 왔습니다만, 1997년 대법원 판결 이후 5.18은 전두환의 내란을 광주의 피로 가로 막은 거룩한 민주화운동으로 성역화돼 왔습니다. 정치권력에 의해 역적과 충신이 뒤바뀌었고, 그 뒤바뀐 역사가 정치권력에 의해 보호되고 있습니다. 2026.5.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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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무게로 먹는다` UFC chicken.

지만원 칼럼

지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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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칼럼 상위 3위

5.18 진실 전도사 지만원 박사의 칼럼을 공유합니다 www.systemclub.co.kr

생성일: 2026년 5월 6일

카테고리: 토론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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