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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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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 멤버·토론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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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실 전도사 지만원 박사의 칼럼을 공유합니다 www.systemclub.co.kr

관리자
관리자•3일 전

이영훈 캐러밴 부대와 공개토론을 제안한다

이진숙 의원이 애국심에서 2026.8.13. 이영훈이 이끄는 캐러밴 부대에게 국회 도서관 회의실을 제공하고, 이진숙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모은 모양이다. 다른 유튜브 방송에서는 이영훈은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폄훼하고, 김대중을 천상의 위인으로 극존대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이영훈의 입에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찬사가 봇물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전두환만 치켜세우면 박수를 치는 우익들도 참 딱해보였다. 이영훈이 발표장에 내건 현수막에는 ‘5.18 민주화운동’이었다. 5.18이 한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오늘도 단상에 [5.18민주화운동]이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그는 늘 5.18이 한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화 역사였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오늘은 이진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전두환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전두환이 위대한 인물이다? 5.18민주화의 정의가 무엇인가? '5.18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의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분노하여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항거한 광주시민들의 의로운 항쟁'이라고 정의돼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이영훈의 입에서 [전두환이 위대한 인물]이라는 말이 나왔다면, 5.18은 전두환이라는 훌륭한 인물에 맞서 싸운 패악질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도출된다. 이런 모순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이영훈은 제정신이고, 여기에 박수차는 우익들도 제정신들인가? 그리고 이영훈은 오늘 나를 모함했다. “지만원씨는 북한군 600명이 서해안으로 일시에 헤엄쳐서 광주에 왔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사람이다” 나의 어느 자료에 이런 내용이 있는지 밝히기 바란다. 저질스럽기 이를 데 없는 막된 인간이 나를 모함 모략하고 있다. 그리고 무식한 말도 했다. “지만원씨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어서 5.18을 연구할 자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했다. 참으로 무식하기 이를 데 없다. 분석학에 속하는 경영과학과 응용수학을 연마한 시스템 분석가가 복잡한 역사를 분해분석 하지 못한다면, 박현채-안병직과 같은 빨치산 교수 밑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자신은 역사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경제학을 공부했을 터인데, 공산주의 경제학도가 무슨 논리로 민주화 역사를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인가? 이 몇 가지만 해도 무식한 구정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나는 23년의 연구를 해서 북한군 개입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영훈은 얼마 동안 5.18을 연구했는가? 무슨 자료를 가지고 5.18을 연구했는가? 글쟁이 황석영의 [너머 너머]를 가지고 5.18을 연구했는가? 무슨 자료를 가지고 연구를 했는지 밝혀야 한다. 자신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나와 5.18에 대해 여러 시간 토의를 하자. 이영훈 캐러밴 부대 4명이 다 같이 덤벼도 된다.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은 이영훈 캐러밴 부대 3명의 전부 또는 일부와 제가 장시간 공개토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선해 주시기 바란다. 응하지 않으면 비겁한 존재들이다. 이영훈이 회피하면 그나마 자존심이 있어 보이는 주동식을 설득해서 접근해 주시기 바란다. 응하면 이는 매우 재미있고 국가에 유익한 흥행이 될 것이다. 2026.8.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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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삼촌•4일 전

권영해 증언의 배경과 신뢰성

1. 배경 김영삼의 대통령 임기는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까지였습니다. 권영해의 안기부장 임기는 1994년 12월 24일부터 1998년 3월 3일까지였습니다. 김영삼은 전두환을 1995년 12월 3일에 구속했습니다. 일단 구속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전두환에게 씌울 범죄사실을 만들어내야 할 위치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 당시 안기부장 권영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홍준표와 권정달을 동원해 1996.1.4.일, 삼정호텔 1110호에서 전두환에게 집권시나리오가 있었다는 허위사실을 생산해냈습니다. 이처럼 권영해는 전두환을 죽이고, 김영삼을 살려야만 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2024. 6.17일, 권영해는 안기부가 북한에 공작원을 보내, 광주에서 사망한 490명의 명단을 가져왔다고 스카이데일리에 증언하였습니다. 이름, 출생일, 출생지, 계급, 소속부대 등이 기재된 490명의 명단은 적장의 서랍에 잠겨져 있는 최상의 비밀문건입니다. 미 CIA나 이스라엘의 모사드도 아닌 국정원이 적장의 서랍 속에 잠겨져 있는 극비문서를 몇 명의 공작원을 보내 꺼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 역시 1980-81년 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해 봐서 국정원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설사 그런 명단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해도 그는 명단을 숨겨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 명단이 발표되면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영웅이 되고, 김영삼과 권영해가 감옥에 가야 할 입장이었는데,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공작원을 적극적으로 북한에 보내겠습니까? 그런 명단은 가져올 수도 없고, 설령 가져왔다 해도 꼭꼭 숨겨야만 그와 그의 주군 김영삼이 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5.18의 진실을 팔 이유가 없었습니다.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그가 적극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5.18의 진실을 밝혀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490명의 사망자 명단은 권영해가 공작원을 북으로 보내서 획득해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490명 명단은 황장엽이 망명 선물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황장엽은 거물입니다. 거물이 다른 나라에 망명을 하려면 그 나라에 줄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490명 명단은 황장엽이 망명의 선물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당시 황장엽의 직책은 대남비서였고, 다남비서라면 490명 명단을 충분히 수중에 넣을 수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황장엽이 망명한 날짜는 1997.2.12.일입니다. 2개월 후인 1997.4.17.일에는 전두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황장엽은 그 명단을 권영해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 명단을 받아 들었을 권영해, 그 즉시 명단을 밝히겠습니까? 밝히면 전두환이 영웅이 되고 김영삼과 권영해가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더구나 2개월 후에는 전두환의 죄가 대법원에서 확정됩니다. 그 명단은 권영해에 의해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권영해가 받은 명단은 1997년 2월, 황장엽이 망명한 바로 그 시점에서 미국 정보당국이 한국으로 날아와 황장엽을 조사했을 때 미 정보 당국으로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미국 정보당국이 가지고 있을 그 정보도 머지않아 비밀해제 되어 공개될 것입니다. 그러면 권영해는 왜 꽁꽁 감춰왔던 그 비밀을 2024.6.20.일과 2024.7.8.일 2회에 걸쳐 스카이데일리에 전격 공개했겠습니까? 2017년 초, 권영해는 교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저를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저의 주장을 황당하다고 내몰았던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냐, 안기부장 아니냐, 지만원이 누구냐, 지만원은 공명심이 높아 헛소리를 한다. 북한의 고정간첩 50-60명은 광주사태에 개입했을 수 있다. 그런데 600명이 말이 되느냐?” 이렇게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7년 후에 갑자기 마음이 변해 북한군 490명이 광주에서 사살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정신이 병들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7년 전의 권영해와 7년 후의 권영해가 왜 바뀌게 되었는지, 불과 며칠 전에 논리적인 실마리가 잡혔습니다. 권영해는 정신적으로 병들지 않았습니다. 2024.7.2.경 서울에서 방위산업 관련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넓은 공간에 넉넉하게 놓여진 한 테이블에 권영해와 미 CIA 한국지부장인 박 모씨가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때 미 CIA한국지부장이 권영해에게 주의를 주는 대화가 어느 한 기자에 의해 녹음되었습니다. “2024.6.20.일에 보도된 그 내용은 원장님께서 노출시켜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못마땅하다고 힐난하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화내용이 의문을 푸는 열쇠였습니다. 아래는 이로부터 도출한 저의 논리적 시나리오입니다. 490명 명단은 권영해도 가지고 있고, 황장엽을 직접 취조한 미CIA 본부도, CIA 한국지부장 박 모씨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➀ 만일 가까운 미래에 미CIA가 그 명단을 비밀 해제하여 공표할 경우, 이것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은 권영해는 어떤 입장에 서게 될까요? 권영해는 매우 중요한 국가정보를 끝까지 감추어온 매국노가 되어 온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장면을 모면하려고 미 CIA가 공개하기 전에 선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국가를 배신하지 않았다~’ ➁ 그러면 미 CIA 한국지부장은 어째서 오랜 파트너로 절친한 어른에게 대놓고 힐난조의 돌직구를 날렸을까요? 머지않은 장래에 미CIA가 490명 명단 관련 정보를 공개하게 되면 그 신선도가 떨어져 한국의 수많은 지인들에게 한국지부장의 역할이 평가절하되어, 자신의 존재가 센세이셔널하게 부각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미CIA의 한국지부장 박 모씨는 부친이 외대 교수입니다. 카추사 신분으로부터 발탁된 노력형 수재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시민권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인들의 발판이 매우 넓습니다. 이 두 인물의 입장을 대조시켜 보니, 490명에 대한 정보는 권영해와 미 CIA가 공유한 정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490명에 대한 신뢰가 확실해 집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되니, 490명에 대한 미CIA의 정보도 곧 공개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신뢰성 490명이 광주에서 사망했고, 그들의 제삿날이 모두 1980.6.19.로 통일돼 있다는 정보는 다른 정보들과 서로 어울립니다. 저는 앞에서 475명이 광주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기록물이 3개 있고, 1980년 바로 그해에 북한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기록영화에서도 흥분된 어조로 내레이트 돼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15명(490-475)은 광주에서 중상을 입고 북으로 가서, 한 사람씩 죽어가, 1980.6.19.일에 모두 죽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북한에서 불리는 [무등산의 진달래] 가사에는 통일을 위해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떼죽음) 당한 북의 자식들이 무등산의 진달래가 되어 해마다 피어난다는 단장의 표현이 있습니다. 북한군이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가 왕창 한 순간에 떼죽음을 당했다는 증오와 슬픔이 함께 용해된 가사입니다. 미 CIA보고서에는 5.18을 주도한 핵심세력은 550여명의 극렬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은 광주인들을 끌고 가 인민재판을 열고, 즉결처형 시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현장 사진들에는 도저히 광주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무장조직, 지휘체계와 분업체계가 시스템적으로 갖추어진 조직의 사진들이 수십 장 있습니다. 이들의 수만 세어도 수백 명에 이릅니다. 결론적으로 권영해의 490명은 그야말로 A급 정보에 속하며, 이는 법관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정보가 절대 아닙니다. 도대체 법관들이 무슨 자격과 무슨 종류의 전문실력으로 이런 정보를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인지, 허탈해집니다. 2026.8.13.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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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9일 전

위대한 대통령 팔아 세작질하는 사람들 이영훈-김용삼 커플링의 의미

광주가 나서서 ‘5.18은 위대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사람들은 비웃는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학당이 캐러밴 부대를 꾸려가지고 대도시를 다니면서 광주의 대역을 맡고 있다. 이영훈-김용삼-주동식이 5.18민주화운동 선전대를 꾸려 5.18은 위대한 민주화운동이라 소리 높여 외친다. 지난번 대구 행사에 이어 이번에는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전라도가 국민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5.18 장사를 할 모양이다. 이들은 대구행사에서 5.18이 위대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5.18에 북한군이 왔다는 주장은 미친 소리라는 주장을 폈다고 한다. 1호 세작 조갑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간에 흐르는 프레임을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조갑제, 그는 위대한 빅정희 대통령을 팔아서 지난 40여 년 동안 우익의 중심에 서서 간첩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북한에 세웠다. 2호 세작 이영훈 두 번째 세작은 이영훈, 그는 조정래가 쓴 태백산맥의 주인공 모델인 박현채의 수제자다, 아울러 서울상대에서 주사파를 양성한 안병직 교수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승만 학당을 세우고 이승만 대통령을 팔고 반일종족주의를 외쳐서 우익의 중심에 섰다. 빨치산계라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5.18을 북한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며 북한의 범행을 소리 높여 감춰주고 있다. 아울러 그는 5.18정신에 민족통일 의지가 포함돼 있고, 김대중의 위대한 리드기 있었다고 강조한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파라고 비하한다. 3호 세작 김용삼 김용삼은 마지막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팔아 우익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그는 1호 세작 조갑제로부터 월간조선 편집장 자리를 이어받아, 전두환 대통령을 팔아 이영훈에 기생하면서 5.18에 충성하고 있다. 이영훈과 김용삼은 5.18 캐러밴을 끌고 다니는 쌍두마다. 조갑제가 박정희 대통령을 팔아 세작질을 하듯이, 이영훈이 이승만 대통령을 팔아 전라도에 충성하는 세작질을 하듯이, 전두환을 팔아 전라도에 충성하는 또 다른 세작이 김용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광주와 법정에서 전쟁 하는 증 나에게는 광주고법에서 진행되는 민사사건이 있고,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되는 형사사건이 걸려 있다. 이제까지의 재판정은 판사의 자의가 지배해왔다. 증거도 논리도 없이 판사 마음대로 죄를 주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걸려있는 지금의 재판에서는 광주와 판사가 코너에 몰려있다. 지난 4월부터 나는 광주고법에 ⓵ 북한군이 수백 명일 수밖에 없어 보이는 광주 현장사진 20개를 제출했고 ➁ 900여 명의 북한 민간인 집단일 수밖에 없는 현장사진 19매를 제출했고 ➂ 무장한 34명 집단이 광주사람 4명의 팔을 꺾어 도청에 데려가 이마 정중앙에 총을 쏘아 처형한 사진과 이 사진을 뒷받침하는 미CIA 보고서를 제출했다. ➃ 이 34명의 무장조가 광주인인가 아닌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서면을 7회에 걸쳐 공격적으로 제출했지만, 기세등등했던 광주의 3개 법무법인은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꿀 먹은 벙어리다. 외통수에 걸린 광주와 판사들 자의적으로 마구 판결문을 써왔던 판사들은 대법관에 이르기까지, 이 무장 체포-살해조 34명의 조장과 부조장이 광주사람이라고 판결했다. 광주사람 두 사람이 무장 체포조 34명을 이끌고 광주사람 4명을 도청안으로 끌어다 총으로 살해했다는 판결이다. 이에 준거해 나의 변호인은 지난 5월, 조장 박남선과 부조장 지용 그리고 성명불상의 32명을 [집단학살죄]로 고발했다. 만일 이 무장 체포조 34명이 광주사람이라면 5.18은 광주의 난동자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한 난동사건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고, 동시에 국가는 이들 34명을 집단학살죄로 처벌해야만 한다. 또한 만일 국가가 박남선과 지용 등 34명을 처벌할 수 없다면, 광주고법은 이전의 판결이 잘못 되었다고 판결해야 한다. 만일 이 34명 무장 체포조가 광주사람이 아니라면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광주는 지금 나에게 세 가지 답을 해야 한다. ➀ 지휘체계가 확립된 20여 개의 무장조직들이 광주시민인가? ➁ 5.23일 도청지역 전체를 독점한 후, 엄격한 지휘체계 하에서 국군을 모략하는 사진을 찍은 900여 명의 민간조직들이 광주시민이었는가? ➂ 그 민간인 집단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프락치로 낙인찍힌 4명을 도청으로 끌고 가 총으로 사살한 무장조 34명이 광주시민들이었는가? 이 세 가지에 대한 대답이 궁해서 광주의 원고 측 10여명의 변호사들이 지난 5개월 동안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 이영훈-김용삼은 부지런히 다니면서 광주에 북한군은 오지 않았다고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대조되는 두 장면이다. 2026.8.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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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14일 전

통합사관학교 설립자가 방위병 탈영자? 개나 소나 다 웃겠다!

3개 사관학교를 통합하는 데 찬성할 지식인들은 없을 것이다. 이들로부터 통합에 반대하는 논리들이 많이 나와있다. 표현된 논리들은 대체로 전문성과 전통성에 집중돼 있다. 이에 더해 교육환경도 강조돼 있다. 해사는 바다와 군함이 있는 환경이, 육사는 남침의 통로라는 전략적 환경과 설립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밴프리트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생도들의 자긍심에 미치는 영향 등이 강조돼 있다. 나는 여기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서적인 요소를 더 얹고 싶다. 이 나라말고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국가를 건국한 인물을 전설화시키고 있다. 그것이 그 나라 국민 전체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그 자존심이 국민 각자의 정신적 에너지이자 그 나라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콘크리트 역할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자기가 나온 고등학교의 설립자가 근사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통합사관학교 설립자는 안규백이 된다. 그런데 그 안규백은 방위병 근무조차 하기 싫어 7개월 동안 탈영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그 외 추잡한 행실들이 여러 개씩이나 도마 위에 오르는 [잡놈] 클래스다. 3개 사관학교를 통합하여 통합사관학교를 설립한 자가 이런 잡놈이라면 그 학교의 역사는 개고기 역사, 잡놈 역사가 된다. 그런 학교에 가고 싶어하는 청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만일 있다면 그들 역시 잡놈의 후예 정도가 될 것이다. 군인은 용기가 생명이고, 용기는 자존감에서 나온다. 이 나라에서 잡놈이 세운 학교에 지망한 청년이라면 그 청년들을 대하는 국민들의 시선도 싸늘할 것이다. 사관학교 교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청년이라면 하빨 중의 하빨 대우를 받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런 양아치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나라가 망가져도 참으로 더럽게 망가지고 있다. 2026.8.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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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4일 전

존경스러운 애국의 증표(證票)

한 국가의 국기는 그 나라와 국민을 대표하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상징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태극기도 1948년 건국 이래 가장 높은 곳에서 힘차기 펄럭이며 삼천리강산을 내려다보며 자국은물론 세계만방에 그위용을 뽐내오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 동대문구에서만 칠 십 여년을 살아온 필자가 오늘 뜬금없이 테극기 얘길 꺼내는 것은 다름 아니라 동대문구 제기동 네거리 대로변에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자리하고 있는 초대형 태극기 빌딩에 대하여 몇 마디 하고자함이다. 지하철 1호선 제기 역 #3출구에서 청량리역 방향으로 100여 메타쯤 떨어진 곳에 한 20여층 쯤 돼 보이는 큰 빌딩이 자리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대형 건물의 전면과 후면의 반 이상이 특수건축자재를 이용 제작한 초대형 태극기로 장식되어있는걸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오며가며 이건물이 눈에 띌 때 마다 건물을 최초로 설계하고 건축한 분에대한 큰 존경심을 품어온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하에서 특히 서울 같은 도심의 지가가 높은 지역에서 이런 대형 건축물을 세울 때는 우선적으로 상업적 이윤추구 목적 하에 설계하고 실행에 옮겨졌을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라 생각한다. 물론 특이하게 초대형 태극기를 넣음으로 더 큰 상업적 베네핏(Benefit)을 얻을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건물의 반 이상이 이태극기 때문에 창문이 전무함을 볼 때 의아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창문이 없는 대신 내부적으로 특수한 인테리어시설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엊그제는 건물의 명칭이라도 알아 볼 겸 가까이 가봤으나 건물이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고 군소 상인들이 하층부에 드문드문 자릴 잡고 있을 뿐이었다. 국가를 상징하는 초대형 태극기를 앞뒤로 메고 있는 빌딩이 오히려 초라하게 보여 관심을 갖고 가까이 접근해본 필자의 맘을 무겁게 하였다. 지금세대 사람들에겐 좀 진부(陳腐)게 들릴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이 산업화의 기반을 닦으며 한참 땀 흘렸던 시절에는 길을 걷다가도 어디선가 국기하강식을 하며 애국가가 들려오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쪽을 향하여 머리숙여 묵념하며 예를 표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요즘은 일 년에 몇 번 있는 국경일에 자기집에 태극기 게양하는 일조차도 극도로 인색해진 상태이다. 국민들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하는 습관은 정치적 이념을 떠나 영구히 지속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이제 자라나는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수학공식이나 영어단어하나 주입시키는 일 보다 태극기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하는 것이 국가백년대계를 위하여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주일 전에 월남찬전 노병들 친목모임에 참석하기위하여 마침 불굴의 애국투사 지만원 박사와 같이 이 태극기빌딩 뒷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초대형태극기를 마치 치마처럼 두르고 있는 빌딩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지만원 박사도 감탄하며 본인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 하였다.필자는 지박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바로 요즘 회자되고 있는 까쉽(Gossip)하나가 떠올랐다. 바로“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는 얘기 말이다. 필자는 오늘 태극기 빌딩에 대하여 비록 두서없이 중언부언했지만 개인적으로 바라 건데 해당 지자체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 의미심장한 건물의 애초의 의도를 살려 나름대로 갈고 닦아서 이곳을 지나치는 국민들에게 나라의 상징 태극기의 대한 존경심을 불어넣을 수 있는 현장이 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하는 간절함을 표하고자 하는 것이다. 202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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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팜•홍보됨

"황금과일 황금인생" 골드팜은 과일,채소,곡물등 농산물 전문 브랜드입니다.

관리자
관리자•1개월 전

12.12. 다시 보기

46일간의 정승화 천하 10.26 이후 12.12.까지 46일 동안은 정승화 천하였습니다. 최규하 권한 대행보다 더 막강한 실세가 정승화였습니다. 정승화는 이 권력을 선용하지 않고 세 가지로 악용하였습니다. 하나는 군법회의 재판을 받고 있는 김재규를 영웅으로 띄우면서 시해사건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권력행사였고, 다른 하나는 그가 각하 시해 당시 시해장소 부근에 있었으면서도 시해현장에서 발생한 총소리가 각하를 시해하는 총소리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당시 그를 내사하고 있는 합수부에 강제로 주입시키려고 고성을 지르며 딱딱거렸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치일선에 직접 개입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공화당 총재 김종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마시오] 저음을 깔아 명령했고, 이에 김종필은 깨갱하며 출마를 접었습니다. 전후방 고위 장군들을 소집해 놓고 [각하는 시해 당할 만해서 시해당했다]는 식의 노골적인 망발을 해서 예하 장군들로부터 면전 항의까지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학봉 중령, “정승화를 체포합시다” 집요한 건의 정승화의 이런 저질적 불법행위를 계속 내사하던 수사단장 이학봉 중령은 전두환 소장에게 세 차례에 걸쳐 정승화를 체포하자는 건의를 올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두환 장군은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미루었습니다, 미루는 동안 정승화의 행패는 더욱 가관으로 치달았습니다. 김재규의 무죄를 암시하는 발표를 한 것입니다. 이에 이학봉 중령은 1979년 12월 6일, 전두환 장군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강력한 건의를 했습니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오래 참았던 결심을 했습니다. “정승화를 체포하라, 체포날짜는 대령에서 진급하는 장군 명단을 발표하는 12월 12일로 하라. 내가 12월 12일, 오후 6:30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서 정승화 채포건에 대해 재가를 건의할 것이다. 전례로 보나 사건의 위중함으로 보나 대통령은 즉시 재가를 할 것이다. 그러니 1월 12일 오후 7시, 나의 추가적인 명령 없이 자동적으로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 한남동의 전투 명령을 받은 보안사 수사단은 007 작전을 수행하듯 정교한 체포작전 계획을 짰습니다.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의 한남동 공관은 그야말로 철옹성이었습니다, 겹겹이 설치된 방어벽을 뚫기가 참으로 어려워 정교한 작전이 동원됐습니다. 아슬아슬하게 공관 정문을 뚫은 체포조 선두에는 허삼수 대령과 헌병 우경윤 대령이 섰습니다. 두 대령이 방어벽을 뚫고 정승화와 공관 응접실에서 마주했습니다. 두 대령의 예의 바른 동행 요청에 정승화는 [버럭]으로 일관했습니다. 부관을 부르고, 경호대장을 호출하여 “이놈들 내쫓으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습니다, 이에 2층에 있던 정승화 아들이 계단으로 내려와 우경윤 대령을 향해 권총을 쏘았고, 육사 출신으로 헌병에서 신망이 높던 우경윤 대령이 그 총에 맞아 평생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보안사 수사관들이 총장의 부관과 총장의 경호대장에 권총을 여러 발 발사했고, 이들은 중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보안사 수사관들, ‘존경하는 우경윤 대령’이 큰대자로 쓰러진 것을 본 순간, 응접실의 거대한 유리창을 M16 개머리판으로 깼습니다. 거대한 유리가 동강나 깨져 내리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했습니다. 한 수사관이 유리조각을 딛고 응정실로 들어갔습니다. 총구를 정승화의 목에 들이댔습니다. “이 개새끼 못 일어나?” 개새끼 소리를 듣자마자 기고만장했던 정승화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순순히 고분고분 수사관들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이 과장에서 공관을 지키는 해병대 병력과 수경사 소속의 헌병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여러 장교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태완의 술주정 정승화의 은혜로 출세한 장군들 중에는 육군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합세하여 전두환 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육사출신 장교들을 증오하고, 심지어는 육사출신 장교들의 이름을 특정하면서 보는 즉시 사살하고, 광화문 일대에 포를 날려 쑥대밭을 만들라는 발포명령을 내렸습니다. 한 사람의 대대장 밑에 편제돼 있는 탱크 중대가 내편 네편 갈라져 서로 총부리를 마주하면서 광화문 거리를 질주하였습니다. 아군끼리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서로 총질을 하는 사태가 동시다발로 여러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순전히 그날 초저녁부터 장군 진급 파티에 초대되어 술을 잔뜩 마신 뒤에 자행된 장태완의 술주정 때문이었습니다. 생쥐처럼 숨어 다닌 국방장관 노재현 이 모든 위험한 내전은 전두환 장군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행동한 최규하 때문이었습니다. 최규하, 과거의 전례나 사안의 긴급성과 내전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려 11시간 동안이나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국방장관 공관은 육군참모총장 공관과 이웃해 있었습니다. 국방장관 노재현은 10.26밤 7:30분부터 이웃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난 총소리에 놀라 단국대 담을 넘어 여의도 부하장군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1공수 병력이 국방부에 진입할 때, 장태완의 술주정 명령에 의해 국방부 청사 옥상에 있던 수경사 소속의 발컨포가 진입하는 공수부대를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이 총소리에 또 놀란 노재현 장관은 미8군 영내에 들어가 피신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최규하는 국방장관이 먼저 서명해야만 자기가 서명하겠다며 버텼습니다. 이런 마당에 국방장관이 이리저리 숨어다니기만 한 것입니다. 그동안 장태완의 술주정 명령이 자꾸만 내려갔습니다. 아군끼리 총질을 해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5명의 장군들이 최규하를 알현하였습니다. 특전사 사령관실에서 보좌관이 공수부대 장병에 의해 사실되는 등 상황이 촌음을 다툴 만큼 매우 위험하니 빨리 재가를 해 달라는 예의바른 읍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최규하는 시종일관 국방장관이 먼저 서명해야만 자기가 서명할 수 있다고 버텼습니다. 국가관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 국방부 청사 계단 밑에 숨어있던 국방장관의 몰골 최규하와 함께 총리공관에서 밤을 지새운 신현확 총리가 직접 국방부로 가서 구내방송을 하여 장관을 찾았습니다. 그래도 노재현은 꼭꼭 숨어있었습니다. 드디어 공수부대 요원들이 지하에서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아래-위에서 동시에 청사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청사 1층 먼지 쌓인 계단 밑에서 노재현이 부관과 함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공수대원들이 놀라 “누구야~” 하고 플래시를 비추면서 총을 거누자 “나 장관이다” 하고 노재현이 나타났습니다. 병사들은 그런 장관에게 [충성] 구호를 외치고 경례를 한 후 장관실로 안내했습니다. 새벽 3:40분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곧장 총리 공관으로 안내되었고, 최규하는 노재현이 내민 결재서류에 서명을 하고 5:10분이라고 서명시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꼬장꼬장하기로 이름난 이희성이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임명됐고, 이희성은 즉시 계엄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전에서 누가 이기나’ 지켜본 최규하와 노재현 이 순간 우리는 역사의 두 인물 노재현과 최규하를 다시 보게 됩니다. 노재현은 단지 무책임하고 비굴하기 때문에 숨어다녔을까요? 아군끼리 총질을 하고 전쟁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수시로 받으면서도 한가하게 국방장관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며 세월아 네월아 무책임하게 시간을 끈 최규하는 단지 훗날 혼자서 책임을 뒤집어쓰는 일을 걱정하는 소인배이기 때문에 재가를 미루었을까요? 이 두 인간은 정승화 군벌과 전두환 군벌이 총질을 하면서 싸우는 내전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를 지켜보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는 것이 이 시각에 제가 내린 역사관입니다. 여기에 이후 소개될 5.17사건에서 최규하가 보인 행동을 더하면 최규하는 음흉하게 위장된 골수 빨갱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2008.에 제작한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상하권에 묘사돼 있고, 아울러 최근(2025)에 발행한 [옥중 다큐소설 전두환]에 스토리텔린식으로 정리돼 있습니다 2026.7.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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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개월 전

10.26 다시 보기

10/26사건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인 김재규가 경호처장 차지철과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사건을 말합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행사를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면서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5시에 궁정동 안가에서 각하의 식사를 준비하시오” 이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권총을 준비하고 무서운 얼굴을 해가지고 비서 박흥주 육군대령과 박선호 해병대령을 불러 차지철과 각하를 시해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차지철과 각하 살해에 김계원 합세 김재규는 또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을 빨리 좀 만나자 하여 1층 단채 건물 앞에 쪼그려 앉아 오늘 차지철을 제거하겠다고 하자, 김계원은 이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차지철을 살해하겠다는 말은 각하도 함께 시해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각하를 그냥 두고 차지철만 살해한다는 것은 각하에게 목을 내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해 과정에 김계원도 거들어 오후 7:40, 김재규는 차지철을 향해 권총을 쏘았고, 이어서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계신 각하를 쏘아 쓰러뜨렸습니다. 확인사살을 하려고 방아쇠를 당기자 권총이 고장이었습니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자 거기에는 김계원이 또 다른 권총을 가지고 있다가 김재규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박선호 대령이 미리 마루에 대기하고 있는 김계원에게 예비로 맡겨놓은 총이었습니다. 김재규와 정승화의 동행 김재규는 바로 옆 동 건물에 대기하고 있는 정승화 육군총장과 한 차를 타고 국방부 지하에 소재한 육군 B-2 벙커로 향했고, 그동안 김계원은 각하의 시신을 인접한 국군통합병원 분원에 옮겨놓고 군의관으로부터 “운명하였다”는 확인을 받은 후, 곧장 청와대 비서실로 갔습니다. 군의관은 초라한 노인이 시계도 허리띠도 너무 초라하고 헐어서 그 시신이 각하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최규하의 음흉한 행동 김계원은 청와대로 가서 긴급히 내각을 소집하였습니다. 장관들이 비서실에 와서 영문을 물어도 김계원은 함구했습니다. 오후 8:40분, 최규하가 도착했습니다. 김계원은 최규하에게 [김재규가 각하와 차지철을 시해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최규하는 이튿날 오전 4시, 비상계엄을 선포할 때까지 함구하였고, 그 이후에도 함구하였습니다. 김재규 편이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차지철로부터 당한 수모가 각하에 대한 불만으로 차곡차곡 쌓였던 것입니다. 밤 11시부터 비상내각회의가 국방부 회의실에서 열렸고, 장관들이 각하를 시해한 범인이 누구냐고 소리를 쳐도 최규하는 침묵한 채, 회의를 주재하였습니다. 육군 총장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합수부장으로 결정한 후, 이 사실을 국방장관실에 홀로 앉아있던 김재규에게 살금살금 가서 회의 결과를 알려주었습니다. 정승화는 김재규가 키운 아바타 정승화가 참모총장이 된 것은 김재규의 덕분이었습니다. 김재규는 추석 선물로 정승화에게 당시 금원 300만 원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강남 30여평 규모의 아파트가 200만 원 할 때였습니다. 충성하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10.26밤, 정승화는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시해 시각에 시해 현장 바로 옆채에서 총소리를 듣고 있다가 일을 끝낸 김재규와 함께 국방부로 가서 김재규의 뜻대로 계엄병력을 배치하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으로 청와대를 포위하여, 경호원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동결시켰습니다. 밤 11:40분, 김계원의 배신은 역사의 순간 김계원이 김재규의 편을 든 것은 김재규가 혁명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이미 다 해놓은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방부에 와보니 김재규에게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김재규를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김계원은 장관 보좌관실에 갔습니다. 장관실에는 김재규가 홀로 버티고 앉아있었습니다. 비상내각회의가 끝나갈 무렵, 장관 보좌관실에는 노재현 장관과 정승화 그리고 김계원이 함께 잠시 앉아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계원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권총을 탁자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습니다. “각하를 시해한 범인은 김재규입니다. 이 총이 바로 김재규가 각하를 살해한 권총입니다” 완전 배신을 때린 것이었습니다.10.26 밤 11:40분, 각하 시해 4시간만의 배신이었습니다. 47세 육군소장 전두환의 등장 이 말을 들은 노재현 장관은 곧바로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즉시 체포하라] 명했습니다. 하지만 정승화는 자기 사무실에 와서 딴짓을 했습니다. 김진기 헌병감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렀습니다. “헌병감은 김재규를 모셔다가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고, 보안사령관은 김재규 부장을 보안사 안기에 정중히 모셔라” 낌새를 챈 전두환은 각하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병원 군의관과 통화를 하는 등 여러 곳을 수소문했습니다. 이상한 낌새를 챈 전두환 장군은 육본에 파견된 보안부대 오일랑 중령에 전화를 했습니다. “너 김재규 얼굴 알아?” “예, 압니다” “그럼 김재규는 네 얼굴 알아?” “모를 겁니다” “그럼 됐어. 너 지금 당장 헌병 복장하고 국방장관실에 있는 김재규를 체포해” 이 과정은 [수사시록으로 본 12.12와 5.18](상-하권)에 스릴 있게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007작전 저리 가라입니다. 체포당한 김재규는 묻기도 전에 그의 시해동기를 줄줄이 토해냈습니다. 정승화와 함께 진행하려던 혁명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전두환 소장은 47세, 촉이 매우 빠르고 용기가 충천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위인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각하의 주변인물들은 왜 각하를 싫어했는가? 그러면 김재규는 왜 박 대통령을 시해할 생각을 했고, 주변의 여러 핵심인물들이 왜 김재규 편에 섰을가요? 차지철과 박근혜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차지철은 각하의 무조건적인 신임을 믿고 심지어는 국무총리까지도 무시하는 언동을 보였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이었습니다. 차지철을 한번이라도 스쳐간 사람들은 차지철에 대해 심한 불쾌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대통령은 저런 버릇없는 망나니를 왜 계속 감싸고 계시지?” 차지철에 대한 반감이 바로 각하에 대한 반감으로 전이됐습니다. 각하에 대한 또 다른 불만은 박근혜가 최태민과 함께 [한마음운동] 등 공식행사들을 활발하게 드러내놓고 벌이고 있는데,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불순해 보인다는 여론이었습니다. 김재규가 총대를 메고 여러 차례 각하에게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건의하다가 대통령의 미움을 샀다고 합니다. “어미 없이 지내는 어린것한테 그게 할 소리냐”는 식의 화를 낼뿐, 정리하기를 미루었습니다. 나중에야 각하의 명을 받은 전두환 장군이 최태민을 강원도 동해안 부대에 격리시켰지만, 박근혜는 전두환 장군을 여러 찾아가 최태민과 함께 하던 일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합니다. 차지철 문제와 박근혜 문제가 시너지를 발하여 각하의 주변 인물들이 각하를 싫어했을 것이라는 게 당시의 주변 여론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최규하와 김계원이었습니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최규하는 위장한 빨갱이라는 생각마저 갖게 합니다. 이후 12.12사건 때와 5.17사건 때의 최규하는 완전 좌빨이었습니다. 2026.7.1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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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개월 전

5.18진실에 재 뿌리는 사람들

5.18은 반드시 [민주화]로 말해야 하는 세상 나는 2003년 초부터 어제까지 24년 동안 5.18을 연구했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량의 노력과 레벨에서 5.18을 학문적 차원에서 학문적 구색을 갖추어 집요하게 연구한 사람은 나와 재미학자 김대령 박사 두 사람 뿐이다. 나는 어제에도 5.18의 진실을 하나 더 찾아냈다. 나는 며칠 전, 대구에서 주동식, 김용삼, 이영훈, 류석춘이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이라는 간판을 걸고 세미나를 열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지금은 [민주화]라는 형용사 없이 단지 [5.18]이라는 말만 해도 경찰이 무조건 송치하고 검찰은 로봇처럼 기소하는 막가는 세상이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진실을~ 이런 세상에 5.18을 주제로 세미나를 한다는 것은 100% 5.18에 아부하는 세미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발표내용을 보니 연구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거의가 다 5.18에 아부하는 내용들이었다. 단지 김용삼 기자가 피상적인 수준에서 지엽적인 가십 정도에 해당하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이 4인의 발표 중에서 학자의 냄새가 나거나 연구의 냄새가 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세 사람은 5.18에 아부했고, 기자는 엉거주춤했다. 특히 김용삼 기자는 최근 연희동에도 여러번 찾아갔던 인물인데 빨치산의 정통 후예인 이영훈을 추수했다. 내가 찾아낸 진실, 김대령 박사가 찾아낸 진실은 이런 존재들이 파리 체 잠깐 휘두르듯이 가십 위주로 찾아낸 이야기들과 차원이 다르다. 조갑제가 나를 인정하지 않듯이 김용삼 기자 역시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김용삼 기자가 빨치산 후예 패거리와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이라는 현수막을 크게 걸고 그들과 부화뇌동한 것은 연희동을 농락한 것 정도로 인식된다. 진실은 이러한 양다리 인생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10.26에서와 12.12에서 최규하의 음흉하고 얍삽한 모습이 바로 김용삼이라는 인물에 오버랩된다. 계산이 얍삽한 기회주의자! 진실을 법에 반영하기 위해 피 흘려 싸우는 나를 비웃는 자칭 애국자들에게 나를 감옥에 보낸 고소자의 대표적 인물은 박남선이다. 박남선은 5.18의 영웅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실 비서실 요원으로도 근무했다, 차기환 변호사, 육사출신 헌병감 이종협, 조갑제 키드 이동욱, 황장수, 신혜식, 고 김진, 조갑제. 정규재 등 우익 코스프레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보랏빛 호수]를 쓴 탈북자 이주성까지도 [광수]와 [지만원]을 묶어서 비난하거니 조롱해왔다. [광수]는 또라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주성은 전 스카이데일리 대표 조정진이 주도하는 모임에서 노골적으로 내 안면에 대고 [광수]를 조롱했다. 지만원은 이 정도로 추락해 있었다. 나는 [광수]로 이긴다! 이들이 지만원보다 어떻게 더 유능한지는 몰라도, 이들이야말로 근자감으로 타인의 능력을 함부로 비하하는 새털 같이 가벼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조롱하는 [광수], 그것이 지금 [광주]와 [지만원] 사이의 벌어지고 있는 목장결투 항목이 됐다. 탈북자 이주성 등이 나를 조롱해온 [광수]로 인해 내가 법정에서 광주 와 5.18을 외통수 코너로 몰아넣고 있는 올무를 놓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광수]를 함부로 얕잡아보고 나를 감옥으로 보낸 광주! 지금 이 순간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게 됐고, [광수]에 대해 함부로 판결한 판사들이 [법왜곡죄]에 몰리게 돼 있다. 나를 비난한 우익들은 누구인가?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나를 조롱해왔지만, 그들이 이룩해낸 성과는 무엇인가? 지만원을 조롱한 성과 말고는 없다. 내가 감옥에 가고, 4억 원을 배상할 때 그들은 나를 동정하기는커녕 비웃고 조롱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서슬 퍼런 광주를 외통수의 코너로 몰아넣고 있다. 5.18재갈법에 대한 위헌소송을 시작했고, 광주가 섣부르게 시작한 [광수] 전쟁에서 광주의 목덜미를 물고 광주의 피를 빨고 있다. 나는 곧 승리할 것이다. 판사가 빨갱이라 해도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2026.7.1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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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개월 전

국힘당은 개자식들

요사이 모든 우익 사이트에 대한 당국의 검열-폭파와 숨어서 벌이는 해킹 공세가 점입가경입니다. 제 홈페이지를 해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많은 접촉자들을 호스팅 업체가 차단하고 있어서, 홈페이지가 열리지 않는다는 호소의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제가 싸워서 한땀 한땀 쌓아올린 5.18과의 전쟁 성과에 무관심합니다. 지금 저는 5.18의 멱통을 물고 매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사이에 북한이 제작한 광주비디오가 다시 등장하여 국민들을 세뇌시키는 모양입니다. 분발해야 할 마당에 일부 이름 없는 존재들이 우익행세를 하면서 제가 연구한 내용이 함량미달이라고 책을 내고 설명을 하면서 격하 공작을 하고 다닙니다. 우리는 지금 전라도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그 노예들이 매일 더 많은 밧줄에 의해 묶여지고 있습니다. 손도 발도 묶이고 입에도 재갈을 물리고 있습니다. 국힘당에 기대를 거는 한, 무늬만 우익인 정치인들에 기대를 거는 한, 내 자식들은 북한처럼 전라도 염전노예처럼 살게 됩디다. 국힘당 인간들은 배지 한 번 더 다는 것이 목적인 개자식들입니다. 지금 아이들은 맑스 교육을 받고 있다 합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정품 콘돔을 사용하라 한답니다. 16세부터는 임신을 할 권리가 있다며 가르친다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훈계하면 학생인권조례에 걸려 재판을 받는다 합니다. 교사가 ‘나도 동성애 한다’며 아이들에게 동성애를 권고한다 합니다. 학생 인권조례가 아이들을 동물로 만듭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곳곳에서 사회원시화, 공산화가 진행 중입니다. 우리 모두 다 감옥에 갑시다. 살자고 몸 사리면 죽고, 죽자고 악을 쓰면 산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모두가 감옥가면 감옥이 모자랍니다. 2026.7.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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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개월 전

육해공군 사관학교를 전남 장성으로 옮기면?

타도 사람들은 전라도 장성군으로 귀양 가려 하지 않는다. 육해공군 사관생도들이 모두 다 전라족으로만 채워질 것이다. 어쩌다 타도 청년들이 입교를 했다 해도 그들은 전라도의 ‘끼리끼리 문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더럽다” 침을 뱉고 퇴교할 것이다. 이후 육해공군 장교단은 100% 다 전라도 인간들이 독식할 것이다. 손 안대고 코를 풀듯 한국군은 완전 전라-인민군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들이 북한 인민군하고 악수를 하면 전라 인민군은 북조선 인민군의 종이 될 것이고, 남한의 부자와 식자들은 아오지 탄광으로 가서 매 맞고 굶주리며 지옥생활을 하다가 송장이 될 것이다. 2026.6.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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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C 치킨•홍보됨

`이제,무게로 먹는다` UFC chic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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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개월 전

독재정권의 운명

독재정권의 운명 2002년부터 시작된 부정선거 이 나라에서 부정선거가 없으면 빨갱이 정권이 존재할 수 없다. 김대중 이후 빨갱이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오로지 부정선거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확고한 지식이다. 부정선거와의 투쟁은 2003년 노무현이 집권하면서부터 불씨가 피어났지만, 23년이 지나도록 부정선거를 의심하는 국민이 별로 없었다. 빨갱이들은 눈알을 꼿꼿이 세우고 “요새 같은 세상에 부정선거가 어디 있느냐?” “요새 같은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느냐?”며 부정선거의 존재, 빨갱이의 존재를 알리는 선각자들을 향해 “음모론자” “극우 또라이” 등의 고약한 언어로 쥐어박았다. 심지어 이재명은 “반국가 세력”이라며 금방이라도 감옥에 쓸어 넣을 듯한 기세로 겁을 주었다. 빨갱이 존재, 부정선거의 존재를 알리는 선각자를 23년 동안 극우로 몰아온 우익들이 오늘의 비극 불러와 이재명 패거리들이 이끄는 빨갱이 집단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힘당 의원들도 선각자들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이준석, 한동훈, 조갑제, 정규재 등과 같은 부류가 빨갱이들을 열렬히 옹호했다. 이런 바퀴벌레들이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선각자들을 멸시해왔다. 빨갱이의 존재, 부정선거의 존재, 이제는 모든 국민이 다 확인해 하지만 지금은 6.3선거의 난장판 복마전을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에 거의 모든 국민들이 부정선거를 실감한다. 이제 이재명 정권이나 이준석, 한동훈, 조갑제 류의 가면을 쓴 광대들은 설 자리가 없다. 이들 위장 우익들은 비겁해서 언젠가는 그동안 열심히 빨아오던 이재명을 버릴 것이다. 이들은 약아서 이재명 정권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직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많이 떨고 있는 존재가 이재명 지금 가장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이 이재명일 것이다. 다음 정권을 민주당에 넘겨주지 못하면 그는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안전하려면 차기 정권을 그의 만만한 수족에게 넘겨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 대선에서도 반드시 부정선거를 가동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죽기 살기로 부정선거를 믿는 대다수 국민을 상대로 아니, 영에이지들과 싸워야만 한다. 이제까지는 부정선거의 존재를 믿는 국민이 소수였지만, 지금은 대다수 국민이 부정선거가 실재함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이재명은 대다수 국민을 적대시하여 탄압해야만 할 입장에 섰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을 적으로 돌려 싸우는 독재자는 반드시 망한다. 김정은처럼 고사포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는 곧바로 미국에 의해 제거된다. 고사포 사격은 북한에서나 가능할 뿐, 한국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재명과 대다수 영에이지 국민과의 전쟁 미래의 세상은 젊은이들의 것이다. 젊은이들은 그들이 살아갈 공간에 독재자가 판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거리에 나선 젊은이들은 정치꾼들의 더러운 계산을 멀리한다. 풍전등화의 공간에서도 교주가 되어보려는 기성세대 인물들, 젊은이들을 자기정치에 이용하려는 교활한 기성세대 인물들, 마이크 한번 잡고, 잘난 체 하려거나 가르치려 하는 기성세대 인물들, 영에이지들은 매우 불결하게 생각하고 경계한다. 기성세대 방식과 영에이지 방식을 섞지 말아야 지금으로부터의 미래는 젊은이들이 열어가는 것이지, 기성세대인들이 열어가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는 표 나지 않게 그들을 도와주는 역할에 멈추고, 이재명과의 전쟁은 영에이지들과 별도로 벌여야 할 것이다. 이재명과 영에이지들과의 전쟁에서 이재명은 절대적으로 패할 것이다. 2026.6.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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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개월 전

올림픽 공원이 나라 바꿀 것

올림픽 공원은 동작역에서 9호선 급행을 타면 10여분 만에 갈 수 있는 장소였다. 올림픽공원역 3번 출구로 나가면 저절로 가게 되는 장소에 인파가 몰려있다. 모여든 인구의 80%는 젊은이들, 광화문 문화와는 대조되는 문화가 열렸다. 광화문 모임은 집회이고, 집회의 왕인 주최자가 있고, 전광판이 있고, 고막을 찢는 스피커가있고, 연사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 모두가 없다. 집회신고를 할 필요도 없다. 집회의 왕도 없다. 모두가 육성이지만 외치는 구호는 하나다. 이번 선거는 확실히 부정선거이니 재선거를 하자, 당일에 투표하고 곧바로 손으로 개표해서 대만이나 유럽처럼 누구나 부정이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선거의 투명성을 100%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자는 발전과 개선을 기피하는 게으른 정신을 가진 자이거나 현재의 부정 음모를 감추려는 자들이다. 이 장소가 계속 붐비고 위 사진과 같은 단일 메시지를 외치는 한 정권은 빨리 붕괴된다. 많은 유튜버들이 이 장면을 취재하여 전국의 국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주권을 침탈당했던 일제 때도 이만큼 국민의 입을 봉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기회를 반드시 키워서 반드시 독재-사기-협잡 정권에 종지부를 찍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시간을 내서 한 번씩 가보는 것이 그들의 용기에 시너지를 가할 수 있다. 2026.6.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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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개월 전

음모로 삼켜지는 국가

1980년 광주사태의 실패가 북한의 군사적 남침 전략을 포기케 했다. 이후 북한은 간첩과 음모로 대한민국을 삼키기 시작했다. 삼키는 메커니즘은 두 개다 하나는 부정선거에 의한 영구집권이고, 다른 하나는 5.18을 마패로 하여 국민에게 재갈을 물리고, 5.18수호세력을 확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지배케 하고 호령케 할 수 있는 완장을 채워주는 방법이었다. 이래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완장부대들이 해마다 폭증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선거는 간첩이 지휘 전자개표기와 사전선거는 부정선거의 절대적인 도구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이 부정선거의 개념은 2000년 김대중이 김정일을 만나면서부터 도입되었다. 노무현을 김대중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정선거가 반드시 필요했다. 조작이 가능한 전자개표기가 바로 이 때 등장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고발을 차단하기 위해 선관위 관련자들을 대법관과 판사들로 메웠고, 내부 고발자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선관위 직원들을 5.18유공자 자식들로 채웠다. 이재명이 이번 투표지 부족 사태에 대해 [이는 대통령 소관이 아니다] 실토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선관위 구성 자체가 수백 명의 판사들과 5.18유공자들 2002년, 전자개표기 개표과정을 감시한 일부 깨인 국민들이 증거를 가지고 부정선거를 고발했다. 정기승, 임광규 변호사님을 중심으로 한 헌변(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이 소송을 주도했지만 이를 재판하는 대법관들의 얼굴은 적대적 포커페이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관위 자체가 판사들로 임명돼 있었다. 중앙선관위 위원장은 대법관으로, 시-도 선관위원장은 부장판사들로, 읍면동 선관위 위원장은 일반 판사들로 임명돼 있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소송이 원천 차단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에 대한 발상은 바쁘게 살아가는 일반 국민들의 머리에서 발상되는 것이 아니라, 밤이나 낮이나 오로지 적화통일 한 가지만 생각하는 천재 간첩단의 머리에서 나오는 성격의 것이다. 선거에 부정이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머리가 많이 모자라거나 아니면 빨갱이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있는 사람이 부정선거를 부정하면 그는 간첩 편에 줄을 선 사람일 것이다. 부정선거와 5.18, 국가를 파멸시키는 쌍권총 지금의 정권은 5.18세력이 잡고 있다. 콩가루같이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방법은 이념이다. 그 이념이 김일성 이론이고 5.18이론이다. 빨갱이들은 차마 김일성을 위대하다고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김일성 대신 사용하는 동의어가 바로 5.18이다. 주사파의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구호가 5.18로 바꾸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파괴하고 있는 정치조직은 민주당 패거리뿐만 아니라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국힘당 정치인들이다. 민주당 패거리를 따라 현대판 [위수김동]을 연호하는 정치집단이 한심하게도 국힘당 패거리들이다. 부정선거 및 5.18과의 전쟁 사 2002년, 부정선거를 처음으로 이슈화시킨 사람들이 있었다. 주시모(주권찾기시민모임)이었다. 일부시민들과 필자 그리고 정기승 변호사님이 이끌던 헌변이 나서서 소송을 진행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우리들을 비웃었다. 김대중이 부정선거의 원흉이라 하니까 사람들은 필자를 또라이라고 멸시했다. 김대중이 김정일의 아바타이고 총독이라고 하니까 사법부가 감옥에 넣었다. 5.18은 광주의 양아치들이 이룩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 특수군이 벌인 게릴라전이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또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필자가 처참하게 살아온 이유는 2002년 [노무현 당선 무효 소송]에 불을 당겼고, 살아있는 권력 김대중을 향해 빨갱이라 외쳤고, 연구를 통해 5.18을 북한 소행이라고 외쳤기 때문이었다. 삼켜지고 있는 국가를 구하는 전쟁은 국군의 몫이 아니라 국민의 몫 적은 이미 20여년 전부터 소리 없이 우리를 삼키고 있었지만, 아직도 국민의 일부는 바둑판을 읽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길은 부정선거라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5.18이 대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을 온 국민에게 알려서 국민을 전라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국가를 보존시키는 방법은 전방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이 싸우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 없는 국민을 널리 계몽시키는 방법뿐이다. 2026.6.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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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
삼촌•2개월 전

5.18영웅 박남선을 집단살해혐의로 고발한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확정판결내용: 박남선과 지용이 집단살인 지휘자들 대한민국 대법원은 2023.1.12. 광주가 나를 상대로 고소한 5.18관련사건 1-2심 판결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간단한 표현으로 나에게 2년 실형을 확정했다. 2심 판사는 장윤선-김예영-장성학이고, 사건번호는 서울중앙지법 2020노804. 판결일은 2022.2.16.이었다. 이 사건에서 대한민국 사법부는 71광수를 박남선이라고 확정판결했고, 73광수를 광주인 지용이라고 확정판결했다. 노담(노숙자담요)은 71광수를 황장엽이라고 감정했고, 73광수를 인민군 대장 오극렬이라고 감정했다. 노담의 감정에는 논리와 증명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사법부에는 논리도 증명도 없었다. 수학적 알고리즘이 현실화되고 있는 안면인식 과학세계에서 안면인식 과학의 문외한인 판사들이 안면인식 과학자의 감정 내용을 권력으로 유린한 것이다. 권력으로 유린했다는 사실은 이후에 연속되어오는 또 다른 사건들의 재판과정에서 정정당당히 증명하고 있다. 막가파 세상일수록 저들의 죄상을 관찰해야 대한민국 사법부의 막무가내식 판결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모든 증거, 모든 논리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가슴을 조금도 울리지 못했다. 대한민국 판사들은 모두 김일성 종교의 신봉자들이고, 막가파의 대명사인 이재명의 아바타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고 대한민국을 부활시킬 활로가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암흑이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지옥인 것이다. 모든 애국자들이 [재선거], [부장선거]를 외치며 거리로 나와 수고하는 동안 나는 민주당의 뿌리인 [5.18]이 세기적이고도 세계적인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입증-현현시키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다. 그 마지막 수단이 바로 박남선과 지용을 집단살인죄 혐의로 고발하는 것이다. 미CIA, 현장사진, 보도매체가 공동입증한 집단살인 사실 광주 현장 사진에는 1980.5.23.에 도청 안팎에서 촬영된 사진들이 매우 많다. 900여 명의 민간인 집단들이다. 모든 정황증거들을 결합해 보면 이들 900여명의 민간집단은 광주인이 아니라 북한인들이다. 이런 분석이 사실에 부합하느냐에 대한 여부를 따질 이유도 없는 4매의 현장사진이 두드러져 있다. 광주사람 4명이 무장괴한 34명에 의해 도청으로 연행해 가는 사진들이다. 미CIA보고서는 이들이 극렬분자들로부터 인민재판을 받고 즉결 처형당했다고 기재했다. 노담은 이들 4명이 해남농민회원 김인태, 광주 학원교사 김중식 등이라고 판독했고, 이들이 도청 안에서 처형당했다고 판독했지만, 법관들은 이를 새카맣게 무시했다. 그런데 2024. 보도매체 [뉴스와논단]이 노담의 판독내용이 사실임을 추적했다. 이로써 박남선과 지용이 포함된 무장 괴한 34명은 광주사람 4명을 집단으로 살해한 집단살인조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졌다. 사진상에 나타난 71광수는 집단살인조의 우두머리이고, 73광수는 부-우두머리로 보인다. 박남선과 지용이 집단살인조 34명의 우두머리와 부-우두머리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이 34명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광주-전라인 4명을 무단 살해한 지휘자라는 사실이 대한민국 사법부에 의해 확정판결된 사람들이다. 살인죄의 공소시효 경과 이 두 사람을 개인자격의 살인자로 고발할 경우 살인 일자가 1980년이라 2015년에 제정된 [태완이법]에 의하더라도 소급입법 문제로 즉시 기각될 수밖에 없다. 1995년 12월에 제정된 「헌정 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 구세주 그래서 5.18특별법과 동시에 1995년에 입법화된 「헌정 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 법률의 제3조 2항에는 “「형법」 제250조의 죄로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규정된 집단살해에 해당하는 범죄” 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아래와 같다. https://law.go.kr/trtyInfoP.do?trtySeq=2256 박남선과 지용은 34명을 이끌고 호남인(광주-전라인) 집단의 일부인 [4명+알파]명에 해당하는 집단을 무단 살해한 지휘자들이다. 바로 이 법률에 근거해 나는 곧 박남선과 지용을 고발할 것이다. 2026.6.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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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개월 전

사전투표 독려자들의 불가사의

사전투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첫째는 사전투표 결과가 통계수학 이론을 정면으로 파괴해왔다는 사실이다. 투표인 수는 천만(10.000.000) 단위로 10의 7제곱(10의 7승)규모다. 이 정도 숫자는 통계학에서 대수(large number)라고 표현된다. 통계학에는 [대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이라는 것이 있다. 투표자 수가 천만인 경우 사전투표와 본선투표와의 차이(편차:variance)는 1/n제곱이다. 투표자 수가 천만 단위(10의 7제곱, 7승)이면 본투표와 사전투표 사이의 오차는 0.000000000000001으로 사실상 제로다. 수학이론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사전투표가 도입되고부터는 늘 사전투표가 본투표의 결과를 뒤집어 버렸다. 통계학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100% 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개표시스템의 문제다. 전자개표기는 운용자의 마음에 따라 작동한다. 이 세상 시스템 중에 100%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인간의 개입이 없는 전자개표기는 없다. 인간의 개입이 있으면 그 개표기는 운용자의 양심에 따라 투표결과를 내놓는다. 이런 전자개표기를 믿으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기이고, 전자개표기를 운영하는 선관위의 양심을 믿으라는 것도 그 자체로 사기다. 이 세상에서 양심이 100% 깨끗하다는 전제하에서 개발된 시스템은 없다. 양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객관성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이 나라 국민의 양심이 모두 깨끗하다면 이 나라에 범죄자가 단 1명도 없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투개표 시스템을 믿으라는 것, 그것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감시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정부, 개표 시스템을 믿지 못하겠다고 당연한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을 감옥에 넣겠다고 협박하는 정부는 이 자체로 사기꾼 정부다. 나는 통계수학에서 수학공식과 수학정리 8개를 발명한 통계수학자다. 아울러 나는 [시스템]이 무엇인지 모르던 1993년, 이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은행객장의 순번대기 번호표] 시스템을 흔들어 보이면서 시스템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두 가지 학문 영역에서 과학으로 단언할 수 있다. 나는 2003년 초, 노무현이 이회창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 대해 불신감을 가졌고, 그래서 2003년 노무현 당선 무효소송에 앞장섰었다. 내가 앞장서면서부터 [헌변](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이 법정투쟁을 도맡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제기하면서 [선거 스스템을 개선하자]고 나서야 할 야당 정치인들이 사전투표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이 심히 기이하고 한심하다. 사전투표 독려하는 우익들이 좌익보다 더 위험 요사이 박근혜가 선거운동에 나섰지만, [사전투표]를 강조하고 있다. 윤석열이 통곡하는 우익들의 애절한 읍소를 외면하고 [사전투표]를 역설했다. 윤석열이 여소야대 정국을 만든 것은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장동혁이 사전선거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힘당 중진 대부분이 사전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이들은 참으로 괴이한 사람들이다. 학습하는 자세도 두뇌도 없는 외골수들이다. 이들이 바로 우익을 분열시키는 청맹과니들이다. 2026.5.2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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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개월 전

우익이 사전투표하면 선거 망한다!

장동혁,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지 않으려면 무엇하러 광주에 갔나? 5.18이 민주당의 무소불위 마패인줄 뻔히 알면서 왜 국힘단 지휘부 총동원해 광주에 갔나? 지휘자는 선이 굵어야 한다 그렇게 선이 가늘어서야 누가 따라주겠나 미CIA 보고서와 권영해 증언에 의하면 광주는 북한군 490명이 광주에 와서 전사하면서 싸운 게릴라전이었다. 그런데 광주와 전라도와 빨갱이들은 이것을 광주의 껌팔이들이 국민 모두를 위해 피 흘려 성취한 거룩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사기를 쳤다. 5.18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은 나와 재판을 하고 있는 5.18기념재단, 광주시청, 광주판사들이 법적 [준비서면]을 통해 이미 다 알고 있다.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빨갱이들은 5.18이 마치 절대자의 마패나 되는 것처럼 군림하면서 국민들이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악용해 치졸한 스타벅스 게임을 벌이고 있다. 아래에 그 진실을 짧게 요약한다. 1980.5.23. 전남도청에는 광주인 4명을 무단 연행해다가 인민재판 열고 즉결 처형한 무장 살인조 34명이 있었다. 광주판사들은 [광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기 편결을 내렸다. 살인조 우두머리와 부-우두머리가 북한인이 아니라 광주인 박남선과 지용이라고 사기-협잡성 판결을 한 것이다. 이제 광주는 법원에서 답해야 한다. 살인조 34명이 광주인인지 북한인인지 밝히지 못하고 박남선과 지용을 살인혐의로 처벌하지 못하면 5.18은 세계적 세기적 대 사기극이 된다. 광주가 이 외통수에서 탈출할 확률은 제로다. 2026.5.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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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개월 전

박정희 미니 평전

한일협정과 박정희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 할까봐 사용과정을 감시했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 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상수도 확장(40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청탁을 차단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일제 공간의 조선왕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1905년 7월 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당시 조선을 일본이 먹지 않고 러시아나 중국이 먹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족이 되었고, 조선족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왕 먹힐 바에야 일본에게 먹힌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와 중국은 일본인들보다 더 잔악하게 욕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일제 치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선악 구별이 반듯하고 도덕심이 강했다. 일본인 교사들 중에는 나쁜 이들도 있었지만 존경을 받는 교사들도 많았다. 5,000년 역사! 9,000여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었다. 5.16과 박정희에 대한 세계지도자들의 평가 키신저: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러시아가 동시에 하려다 붕괴되지 않았나.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구한 혁명이 5개다. 일본의 명치유신, 터키의 게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한국의 박정희다. 이중 경제기적을 이룩한 혁명은 오직 5.16이다. 엘빈토플러(제3의 물결):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는 그 나라 수준에 맞게 제한돼야 한다. 이를 놓고 독재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 모델은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다. 폴케네디(강대국의 흥망):박정희는 세계 최빈국의 나라를 불과 20년만에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키웠다. 푸틴: 박대통령에 관한 책은 다 구해 달라. 그는 나의 모델이다. 아이젠하워: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주의 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콴유: 박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말레지아의 마하티르 전 총리와 캄보디아 훈센총리도 박대통령 추종자로 유명하다. 등소평:박정희는 나의 멘토다. 후진타오:나는 새마을 운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 김정일:옛날에는 유신이다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새마을운동 덕에 경제가 성장한 건 사실 아니냐. 서울은 도쿄보다 더 훌륭한 도시로 조선의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5.16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눟는 환경 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해방 이래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 나마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 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사기꾼 같았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5.16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19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은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써클을 두었고, 당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고 욕을 하면서 고속도로 작업 현장에 가서 드러누웠다.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었다. 김대중! 금강산 사업, 평양체육관 건설, 자동차공장 건설 등 합법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5조에 가까운 국가재산을 퍼주었고, 국민 몰래 5억 달러 이상의 군자금을 적장에게 바쳤으며, 자신은 아방궁을 지어놓고 호화롭게 살았다. 이런 자에게 당시의 청구자금이 갔다면 김대중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참으로 아찔해진다. 박정희! 진해 별장에서 기자들에게 허리띠를 보여주었다. 나긋나긋하게 얇아져있는 허리띠였다. 모든 기자들이 숙연해 했다.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가 도둑이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도둑일 것이다. 누구든 박정희를 도둑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댐과 동시에, 그 자신의 도덕성부터 공개해야 할 것이다. 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5.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기능학교들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됐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 호소했다. 박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sunset items)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기술자료(TDP)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릎 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도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초라하지만 집 이름이 ‘영빈관’이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의 대통령들에게는 과학이 입으로만 중요했다. 국가경영능력만을 보면 박대통령은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누가 비하해도 박정희는 이미 세계적 인물로 우뚝 서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있다. 반면,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를 보자.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금을 배급해 주었다. 들에 가서 풀을 뽑고 코스모스를 심으면서 절반 이상을 놀다가 오면 하루에 22,000원을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벤다며 소주 마시고 낯 잠을 자다 오면 37,000원씩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니까 이들은 공장이나 들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는 사실상 일자리 죽이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무너진 기업 수는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김대중은 기업죽이기의 명수였다. 시쳇말로 쨉이도 안 되는 매국-빨갱이 정치꾼이 배우지 못한 무리들을 이끌고 박정희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 “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 값을 의미했다. 주고받는 것은 손 벽이 마주쳐야 한다.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제로 전투기를 만들고, 항공모함을 만들어 미국에 대적했을 때까지도, 조선은 손바닥만한 창경궁에서 서로 모함하고 모략하면서 싸움질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건설한 철로와 도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끄덕 없이 공고하게 유지되는 교량과 터널, 항만, 발전소, 비행장을 당시의 위정자들이 건설할 수 있었을까?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의 조선을 자치 능력이 없는 나라, 현대적인 법률과 행정기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미개국이라며 일본에 통치권을 허용해 주었다. 일본인들 역시 자기들이 아니었으면 한국의 개화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 국민의 고혈을 짰다고 하지만 일본 총독부가 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이 자본을 투자했다. 조선왕조의 능력으로는 총독부건물, 화신, 신신, 반도 등 당시 최대규모의 건물들도 지을 수 없었고, 더구나 항만, 철로, 발전소,도로 등을 건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전 후 일본은 그들이 이룩해 놓았던 모든 자산들을 고스란히 두고 갔다. 이것이 일본의 귀속자선(vested property) 23억 달러다. 이 23억 달러는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했을 때의 대한민국 총자산의 80%였다. 일본이 북한에 놓고 간 자산이 26억 알러, skagksa에 놓ㄹ고 간 자선이 23억 달러였다. 이 많은 자산을 놓고 간 것도 억울하다면서 일본은 왜 또 1965년에 한국에 8억 달러를 주었는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욱박질렀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박정희를 성토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 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지 않을 것이한 한다.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자존심이다. 자존심도 모르는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 영혼에 때가 묻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세계 도처에서 멸시를 받고 있으며, 유독 대한민국의 시계만 거꾸로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 국교가 정상화되고, 박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포항제철에 들어 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 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질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함량미달들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9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제조업을 생각해 보자. 눈에 보이는 비용은 불과 몇 개에 불과하다. 재료비, 인건비, 보증수리비, 검사비, 하자수리비, 테스트비, 재작업량, 반품 및 폐품처리비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비용들이다. 그러나 장부에 잡히는 이런 비용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더욱 크다. 단지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말없이 발길을 돌리는 고객으로부터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무식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설계변경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설계시간이 많이 걸려서 시기를 잃는 경우의 비용이 그런 이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기계고장으로 발생되는 비용, 근로자가 자존심을 잃음으로써 발생되는 비용이 장부에 기록돼 있는가? 복잡한 행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비용, 애매한 목표와 기준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행정의 복잡성과 무능 그리고 행정 지연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직장 내의 불쾌감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하청업체를 과도하게 경쟁시킴으로써 발생되는 비용, 비생산적인 회의로부터 발생되는 기회비용 등이 회계장부에 잡히는 비용인가? 무능한 경영인들은 눈에 보이는 비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유능한 경영자의 눈에는 수면 하에서 보이지 않고 유발되는 비용이 더 크게 보인다. 신중을 기한다고 행정을 미루고 있는 동안 경쟁업체는 새로운 제품을 가지고 시장을 누빈다. 이런 비용은 회계 장부에 없고 그래서 비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일협정으로부터 들어온 이익 역시 이러한 식으로 무능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많이 받아내자고 떼를 쓰고 있는 동안 한국을 지지했던 미국의 마음이 식상해질 수도 있으며,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기회만 놓치고 시간만 허송한다. 만일 더 기다렸다가 그 배상금을 김대중이 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가다렸다가 그 후의 다른 대통령들이 받았다면 그들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자기들도 뜯어가고 집행과정에서 온갖 세도가와 사기꾼들이 달려들어 줄줄이 새어나갔을 것이다. 고쳐야 할 한국인의 정신: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자 덴마크! 인구는 겨우 500만, 국토는 한국의 5분의 1, 땅은 모래밭과 황무지, 그러나 지금은 국민소득 33,000달러의 선진국이다. 1813년부터 나폴레온과 독일의 침략을 받아 곤궁할 대로 곤궁해진 터에 또 다시 영국과의 7년 전쟁을 치르면서 넓고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겼고 남은 것은 노약자와 부녀자뿐이었다. 절망이었다. 일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때에 나타난 [그룬트비히]가 정신적 혁명을 일으켰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국민 정신이 바뀌자 국가가 바뀌었다. 한국인 졸부가 일본 최고의 호텔에 머물면서 최고로 비싼 그림 한 점을 배달시켰다. 배달원은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포장지에 약간의 자국을 가리켰다. 싸고 또 싼 것이라 그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포장도 상품으로 취급한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금전적 보상은 얼마든지 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 한국인에게 순간적인 욕심이 발동했다. 그림 값에 버금가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배달원은 그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나갔다. 영악해 보이는 한국인, 그 영악해 보이는 것만큼 한국 사람들이 잘 사는가? 어수룩해 보이는 일본인, 그 어수룩한 것만큼 일본인들이 못사는가? 일본인은 아픈 것만큼 자기관리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인은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을 것이다. 밖에서 많이 얻으면 얻은 것만큼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안에서 얻은 것이 밖에서 얻는 것보다 많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인 역사학자를 친구로 한 적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미국 증권시장 부회장으로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부친이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려 했다. 그는 거절했다.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은그릇을 나눠주려 했다. 또 거절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걸 받으면 자식의 정신이 병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으면 그 후 제가 아무리 더 많은 것을 보태도 그건 제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스스로 이루어 보겠습니다". 전후에 일본인들은 미국을 무작정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거지처럼 공장 문 밖을 기웃거렸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미국인들은 그런 일본인들을 멸시했다. "일본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미국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문을 활짝 열고 다 보여줘라". 1962년 당시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수많은 군중을 향해 미국의 우월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은 기술 측면에서 영원히 미국과 경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매우 훌륭한 손수건과 훌륭한 파자마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을 미국에 수출하려 하지 않습니까?". 미국 공장을 기웃거리는 꼴사나운 정경을 멸시하는 연설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의 모든 생산기지가 미국에 있었고, 세계의 신제품은 모두가 "MADE IN U.S.A" 였다. 미국인들의 우월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만들어 지지 않은 모든 제품을 쓰레기처럼 경시했다. 이를 NIH 증후군(Not Invented Here Syndrome)이라고 불렀니다. 이러한 모욕을 무릅쓰고 일본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선생님을 불러들이고 미국을 견학하면서 미국을 모방하려 애썼다. "미국을 모방하자" 영어로는 "Copy the West"가 당시 일본인들의 목표였다. 일단 모방한 다음에 그들의 목표는 "미국을 따라잡자" 영어로는 "Catch up with the West"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거꾸로 미국이 일본을 배우려고 팔을 걷었다. 그 결과 1982년 즉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조롱 섞인 연설 이후 20년만에 승용차에 대한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일본 승용차가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 차는 겨우 7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일본을 정말로 증오하는 사람은 일본을 배워 일본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일본의 배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제발, 이제는 더 이상 치사해지지 말고 체신을 지키고, 겸손한 작세로 배우려는 자세와 매너를 가졌으면 한다. 2026.5.2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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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개월 전

입법-사법-행정 기관이 총동원하여 5.18학설 죽이기

(위헌법률 심판 청구신청서 중에서) 5.18성역화의 호위무사 역할은 ⓵ 광주시 ⓶ 5.18기념재단 ⓷ 광주변호사회 ⓸ 광주법관 등이 연합하여 수행합니다. 이 호위무사 집단의 공격목표는 신청인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신청인의 학설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도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대한민국 입법기관인 국회는 2019년에 [5.18진상규명법]을 제정하고 그 3조 9항에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 침투조작” 여부를 규명하라는 명령을 적시하였습니다. 신청인이 한 굮가의 입법 목표가 된 것입니다. 이 법률에 의해 구성된 [5.18진상조사위원회]가 당시 대통령에 의해 구성되었고, 광주시민으로 구성된 107명의 조사위가 2019.12.부터 4년에 걸쳐 519억 원의 국가예산을 사용하면서 보고서를 발행하였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신청인의 이름이 명기돼 있고, 신청인이 저술한 이 사건 도서 [5.18작전 북한이 수행한 결정적 증거 42개]의 제목이 명기돼 있고, 이 저서 내용이 집중적으로 탄핵돼 있습니다. 신청인의 저서가 국회와 행정부의 공식적인 공격목표가 된 것입니다. 5.18조사위원회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고, 학력이 공개되지 않은 광주시민 100여명을 임시-공무원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1급으로부터 9급에 이르는 임시공무원 직분을 부여하였습니다. 신청인이 저서에 수록한 42개 증거 전체에 흐르는 ‘전체적 맥락’을 파괴하기 위해, 42개 증거 중 미CIA 보고서,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증언 등 중요한 증거들은 기피하고, 책에 명시돼 있는 42개 중거 중, 극히 일부만을 뽑아, 살라미 식으로 잘라, 낱개 항목을 체크리스트로 전환하고, 각 체크리스트에 대해 임시직 공무원들로 하여금 OX를 치도록 하는 비학술적 방법으로 한 학자가 22년에 걸쳐 연구한 학술서를 불온문서로 낙인찍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요로에 배포하였습니다. 한 개의 학설을 공격하기 위해 한 국가의 국회가 입법을 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가 광주사람 100여명을 뽑아 그들에게 1급으로부터 9급에 이르는 임시공무원직급을 부여한 후, 그들로 하여금 한 학자의 학설을 비-학술적인 방법으로 탄핵하는 무식-무도한 행위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취할 수 있는 방식인 것인지 심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가가 조폭수준으로 추락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청인은 1993년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무질서했던 은행객장에 [순번대기번호표 시스템]을 설치하니까 질서가 향상되었고, 의식도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화두로 이 나라에 시스템 이론을 처음으로 계몽했던 시스템 학자입니다. 시스템 학자인 신청인은 민주주의를 시스템적 시각으로 정의하였습니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하는 정치시스템이다.”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혜를 창출해내려면 자유로운 공론의 시장이 존재해야 하고, 공론의 장이 얼마나 발달돼 있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질과 격이 달라진다는 것이 신청인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구동하는 기본 엔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식 잣대를 적용한다면 하나의 학설은 다른 학설에 의해 도전받고, 자유시장 경쟁원칙에 의해 공론의 공간에서 그 우열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청인의 학설에 도전하는 학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월권하여 학문분야를 침범하였습니다. 지금의 이 국가가 국가기관들을 총동원하여 국가권력으로 하나의 학설을 도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국격을 추락시키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 국가의 처사가 합헌인 것인지 심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26.5.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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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관리자•2개월 전

지만원이 죽으면 5.18이 산다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이 고사되고 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는 한 게시물 당 조회수가 1만-2만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내가 출소하니 게시물 당 조회수가 3백 명 내외다 해킹이 있는지는 몰라도 어떤 글에는 조회 수보다 추천수가 더 많은 경우도 있다 나와 사회와의 소통수단은 오로지 내 홈페이지뿐이다 그런데 [네이버]는 내 홈페이지를 막아놓았다. [네이버]와 소송을 하려 해도 이제는 여력이 없다 5.18과의 소송, 탈북자들의 소송에 대응하기에도 벅차다 내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길은 구글에서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을 입력하는 방법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찌 사회와 교통할 수 있을 것이며 교통이 없으면 5.18과의 전쟁은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전쟁터의 장수는 격려로 시기를 얻는다 그런데 내게는 격려가 없다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이 진정한 애국자들이라면 5.18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만이라도 시스템클럽의 존재를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구글]에서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검색하기를 열심히 전파-선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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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2개월 전

좌익에 당한 억울함, 우익에 당한 서운함

내가 좌익으로부터 당한 억울함은 공격의 억울함이었다. 내가 우익으로부터 당한 억울함은 무시와 경멸의 억울함이었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5.18만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해방 전후의 역사를 참으로 많이 공부했다 나는 자부한다. 내가 쓴 4.3역사책 [지워지지 않는 오욕의 붉은 역사 제주 4.3 반란사건]이 최상의 4.3 역사책이라고. 4.3 역사를 가장 정확히 영화로 부각시키려면 내 역사관과 역사지식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김덕영 감독은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역사 장면의 A구역을 클로즈업 시켜야 하는데 엉뚱한 B구역을 조명했다. 나는 김구의 역사를 매우 잘 안다. 그를 김일성에게 데려간 간첩 성시백의 김구 사냥 역사를 잘 안다. 김구(본명 김창수)가 북한 역사책에서 어떻게 정의돼 있고, 북한 영화에서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 아주 잘 안다. 한마디로 김구는 인간 이하의 잡놈이다. 이런 김구를 위대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왜 역사적 인물로 띄워주셨는지 그것이 매우 아쉽다. 나는 제3의 애국적 영화감독이 꼭 나를 찾아와 내 이야기를 참고하여 새로운 4.3영화를 제작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덕영, 권순도가 이니더라도 새로운 정신을 가진 감독이 나를 찾아주었으면 한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나는 5.18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빨갱이들에게 빼앗긴 해방전후사의 역사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많은 현대사를 연구했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4.3 영화와 현대사 영화를 만든다면, 빨갱이에 빼앗긴 역사를 다시 찾아올 확률이 99%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익의 역사는 남사당 문화인 감성의 역사였다. 우익의 역사는 수학의 역사여야 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역사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인물들을 찾아, 내게 연결시켜주시기 바란다. 나는 이런 일로 단돈 10원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데도 나는 우익으로부터 도외시당하고 있다. 2026.5.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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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칼럼

지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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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실 전도사 지만원 박사의 칼럼을 공유합니다 www.systemclub.co.kr

생성일: 2026년 5월 6일

카테고리: 토론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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