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우산혁명의 실패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광장의 열기가 제도의 문턱을 넘지 못할 때 우산은 비를 막을 뿐, 물길을 내지는 못한다 우린 그렇게 모였다. 우린 그토록 애절했다. 고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정의가 다시 오기를 바랐다. 집회 행진의 한복판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며왔다. 그것은 단순한 선율이 아니라, 이 시대의 절박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 곡이 바로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 만들어진 민중 가요 'Glory to Hong Kong'을 개사한 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처음 느꼈던 벅찬 감정은 더욱 큰 서글픔으로 바뀌었다. "Liberate Hong Kong, revolution of our times (홍콩에 자유를, 우리 시대의 혁명을)" 그들은 그렇게 노래하며 거리를 걸었고, 그 노래는 곧 시대의 언어가 되었다. 당시 홍콩 인구의 1/3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검은 우산을 들고 도시를 메우며 이 노래를 애타게 불렀지만, 그 거대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자유를 지켜내지 못했다. 한때 우산으로 거리를 가득 메웠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홍콩 우산혁명의 열기가 휩쓸고 지나간 후, 그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누군가는 도시를 떠났고, 또 누군가는 시린 공허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결국 혁명이 남긴 것은 변화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기억뿐이었고, 제도로 이어지지 못한 혁명은 흩어지며 그 자리에 침묵과 공백만을 남겼다. 우리는 이미 목도한 바 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열기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사라진 이후,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종류의 침묵이 남게 되는지를. 역사는 언제나 냉정하며, 광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항상 권력의 이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수많은 경우, 그것은 그냥 소모되고 흩어지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홍콩의 사례는 그 비극적 결말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준다. 수십만의 시민이 거리를 메우고, 젊은 세대는 자신의 미래를 걸고 우산을 들었으며, 우산은 그들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는 그 장면을 숨죽여 주목했다. 그러나 정작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계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으나 누구도 그들의 현실을 대신 바꿔주지는 않았고 국제 여론은 존재했지만, 그것이 권력을 움직일 힘으로 작동하지는 못했다. 남은 것은 기억과 상징,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피로감뿐이었다. 어떤 광장은 역사를 바꾸고, 어떤 광장은 왜 그냥 사라지고 마는가? 혁명은 거리에서 시작되지만, 권력은 언제나 제도 안에서 작동한다. 결국 문제는 단 하나다. 거리의 에너지가 제도로 진입했는가, 아니면 그 문턱에서 막혔는가 하는 것이다. 비폭력이 결코 무모한 방식만은 아니다.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보여주었듯, 그것은 때로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그러나 그 힘이 현실을 바꾸는 경우는 단 하나, 제도를 움직일 수 있을 때뿐이다. 광장에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우산을 들고 서 있다 하더라도, 그 에너지가 정치와 법, 그리고 제도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정의 표출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결국 제도적 출구 없는 비폭력은 혁명이 아니라 소모에 가깝다. 홍콩 민주화 시위가 멈춰버린 이유는 거리의 에너지가 제도로 이어질 통로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는 거리에서 외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결국 제도 안으로 들어가 세력을 구축하고 숫자를 확보해야 움직인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조직과 숫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난과 공격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권력을 바꾸는 일은 그 안으로 들어가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다. 최근 전한길 씨가 국민의힘을 탈당한 이후, 'MAGA WITH ROK'이라는 구호 아래 한미동맹단을 이끌며 매주 미군 기지 앞에서 우산혁명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집회 현장에서는 미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메시지와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인쇄된 수천 개의 하얀 우산이 거리를 뒤덮고 있다. 그 취지, 즉 답답한 정국 속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절박함과 외부의 힘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기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제도권을 떠나는 선택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한길 씨와 같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당 내부에서 더 큰 목소리로 지도부를 압박하고 방향을 바로잡는 동력으로 쓰였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은 더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파 진영이 반복해온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단체와 정치권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시민사회에서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경로가 오랜 기간 축적돼 온 좌파 진영과 달리, 우파 진영은 시민단체, 지지층, 그리고 정당이 서로 유리된 채 각자의 영역에 머물며, 거리의 에너지가 제도권과 단절된 채 소모되어 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문제는 열기의 부족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낼 구조의 부재였다. 우파 진영이 이처럼 각각 서로 분리되어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제도권과의 끈을 놓아버리는 전한길 씨의 선택은, '거리 → 조직 → 정당 → 제도 변화'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스스로 끊고 광장의 목소리를 제도권 안으로 진입시키는 것을 더욱 요원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다리를 내려놓은 채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는 없다. 검은 우산이 하얀 우산으로 바뀐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결국 필요한 것은 아스팔트의 열기와 제도권 활동의 결합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인재와 세력을 규합하고, 조직화와 제도 구축을 통해 내부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의 개입을 기대하며 우산을 흔드는 일은, 비를 부르기 위해 하늘만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산은 비를 막을 수는 있어도 권력을 바꾸지는 못한다. 정작 필요한 것은 땅 위에서 물길을 내는 일이다. 우리가 홍콩 우산혁명의 실패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거리의 에너지가 제도로 이어질 통로가 없을 때 그 운동은 결국 멈춰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디, 하얀 우산혁명이 홍콩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옴팡진TV 자율 후원 국민 781402-04-026796 이*주 #태극기집회 #우파집회 #보수집회 #자유우파 #애국보수 #자유민주주의 #한미동맹 #윤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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