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문칼럼] ‘암살자(들)’이 부른 역풍
육영수 여사의 부활인가? 박정희 대통령의 부활인가? 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합심하여 좌파 예술가인척하는 선동꾼들을 질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는 고사가 생각나는 일이 2026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영화 ‘암살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부인까지 제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는 억지를 ‘영화적 상상’이라는 명분으로 위장하여 내질렀다. 예전 같으면 좌파들은 환호하고, 우파들은 부르르 떨면서도 어쩌지 못한 채 한숨만 쉬고 말았겠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이럴 수가 있나’ ‘해도 너무했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배우들을 퇴출하자’ 는 등의 분노 섞인 목소리들을 세대 구분 없이 쏟아내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잠시 흥분하다가 마는 수준이 아니라 흥행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다. 우파 진영 전부가 결집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위세의 눈치를 보는 탓인지 이 영화에 추천사를 보냈던 배우들이 철회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런 일 또한 처음 보는 일이다. 좌파들은 5.18에 대해 의문이라도 제기하면 이미 밝혀진 사실에 대해 딴지를 건다고 발작한다. 얼마 전 5.18 토론회를 주최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을 제명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좌파들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 역사의 위대한 영웅들은 짓밟고 모욕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어깃장을 놓거나 심지어 전쟁을 일으킨 세력에게는 위대한 영웅처럼 우상화하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하고 오히려 분단된 나라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거창한 시도라도 한 것처럼 떠받든다. 좌파들이 영화를 문화 선전의 수단으로, 선동의 무기로 활용해 온 역사는 영화 탄생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미디어가 대중화 단계를 넘어 개인화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선전으로서의 영화, 무기로서의 영화는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는데도 대한민국에서만은 똬리를 튼 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하더라도 결론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데로 모인다. 친일파가 세운 나라,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나라, 특권과 차별이 넘치는 나라, 미국이 대한민국의 목줄을 거머쥐고 쥐락펴락하는 나라쯤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기업가들은 탐욕스럽고, 무책임하며 잔혹하다. 노동자들을 혹사시키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사정없이 해고해 버린다. 호화로운 요정 밀실에서 권력자들과 음모를 꾸미거나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호의호식하는 반사회적 인물로 그려진다. ‘재벌’은 노동자들을 수탈하고 부패한 권력과 결탁하여 문어발식 기업 확장이나 일삼는 ‘거대 악’과 같은 말로 쓰인다. 영화 ‘베테랑’에 등장하는 재벌 2세 조태호는 회사 고위직에 앉아서는 향락과 마약에 빠진 채 하위 직원들을 하인보다 못한 취급한다. 한국 영화로서는 칸영화제 최고상과 아카데미영화상 작품상을 차지한 ‘기생충’에서는 기업가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감독 봉준호는 ‘괴물’에서 한강에 독극물을 강제로 버리도록 명령하는 미군 군의관을 악의 상징처럼 묘사한데 이어 ‘기생충’에서는 기업가를 이유 없이 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 감독이라는 자의 밑바닥에 깔린 반미주의와 반기업 정서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한국 영화의 대한민국 저주가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의 일부일 뿐이다. ‘암살자(들)’의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을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치우고 마는 야비한 독재자이자 성격파탄자로 이미지 메이킹 하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측에서는 내심 ‘영화가 잘 나왔다’고 자신만만해하며 열광적인 선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개봉 초기에는 하루 50만 명 내외의 관객이 들었으니 무난히 성공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영화 내용이 알려지면서 거대한 역풍에 휘말렸고, 그 여파는 영화계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는 상태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 ‘영화적 상상력’ 이었다거나 ‘영화는 영화로만 봐달라’ 따위의 소리는 좌파 영화인들이, 시비라도 생길라치면 습관처럼 앞세우는 말이다. ‘암살자(들)’은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도 현장 경호를 담당했던 서울 중부경찰서 소속 형사 ‘철구’, 사건의 이면을 의심하는 동성일보 사회부 부장 ‘재환’, 그날의 혼란을 직접 목격한 신입 기자 ‘영일’ 등 주요 캐릭터는 대부분 허구의 인물이다. 진실을 밝힌다는 명분을 앞세워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영화 만들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권력욕에 빠진 채 환락에 빠진 인물처럼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시각으로 일관했다. 취기가 오르면 일제 시절이 그리운 듯 일본말로 감정을 토로하기도 하고, 정무는 관심도 없고 주색에 빠지는 비루한 인물처럼 그린다. ‘남산의 부장들’은 박통이라고 부르는 대통령의 모습을 동물원 우리 속의 원숭이같이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을 의로운 영웅처럼 묘사한다. 전직 부장 박용각은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통의 독재적 행각을 비난한다. 영화는 박통이 일련의 일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쪽으로 몰아간다. 가상의 영화적 구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벌어졌던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정의로운 일이었다고 우기는 것이다. ‘서울의 봄’은 군인들이 나서 질서를 바로잡은 일을 야욕에 눈먼 군인들의 반란으로 몰아간다. 전두광 그룹은 권력에 눈먼 정치군인들이고, 막아선 이태신 수경사령관은 참군인이라고 설정해서 선악의 대립 구도인 것처럼 만든다. 결국 특정인을 매도하고 악마화하는 방식이다. ‘암살자(들)’은 이런 영화들의 연장에서 또 만들었겠지만, 임계점에 이르러 끓는 물처럼 거센 역풍을 만나고 말았다, 영화를 만든 쪽에서는 기대와 완전히 다른 ‘사태’를 만난 것이고, 분노하던 우파 진영 역시 뜻밖의 ‘기적’을 목격한 셈이다. 이번 ‘사건’은 해당 영화에 대한 반격이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좌파의 선동 영화가 움츠러들게 만드는 분기점처럼 보인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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