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실은 활자와 현장사진에 있다!
1. 활자에 담긴 진실
1) 군 상황일지 요약
“300명의 시위대가, 5월 21일 오전 08시에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하고, 하루 전날에 [군분교]라는 작은 교량을 중심으로 하는 매복지점에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가두리장을 설치한 다음 5.21.08시에 계획대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차량부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한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인근에 있는 군용차량 제조사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했고, 09시에는 또 다른 300명이 5대의 버스를 타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접근하여, 총 600명이 공장을 점령한 후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400대를 탈취하자마자 마치 예행연습을 한 사람들처럼 곧장 전남 17개 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와 8톤 분량의 TNT를 탈취해가지고 전남도청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그날 밤부터 광주교도소를 5차례 야간공격했다.”
2) 미 CIA보고서
⓵ 시위를 주도한 극렬분자들의 수는 550여 명, 50여 명이 지휘부이고 500여 명이 실행자들이었다. 이들은 북과 연계돼 있다.
⓶ 이들은 광주시민들을 체포해 인민재판을 열고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벌써 여러 명 처형됐다.
⓷ 목포에서 민간인 그룹이 대거 광주로 이동하여 시위에 동참했다(사진상의 판독 결과 900여 명의 북한 남녀노소 어린이로 구성된 그룹이 광주시민 가장한 장례 행사에 총동원).
3)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서 3권, 북한이 제작한 5.18 기록영화에 활자화된 북한군 사망자 475명.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서 3권에 475명의 시체가도청에 쌓였다며 분노의 표현을 했다. 광주시민 사망자는 모두 154명뿐이며, 이들은 도청 옆 건물인 상무관에 따로 집결돼 있었다. 권영해는 이후에 안기부 조사를 통해 북한군 490명이 광주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475명은 광주에서 죽고 15명은 중상상태에서 북으로 철수한 이후 6월 19일까지 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475명 중 430구가 청주유골인 것으로 추정돼 있다.
4)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서 2권, 한국군 상황일지, 남한의 검찰보고서(1995)에 활자화된 극렬분자 수 600명으로 기재돼 있다.
5) 5.26 새벽에야 구성된 [항쟁사령부] 지휘부 요원들이 곧 5.18 최상위 유공자들이다. 이들이 2002년 12월에 증언한 내용들이 [5.18항쟁 증언자료집]에 수록돼 있다. “광주인들은 광주 시위를 주도하지 않았다.”
광주인들은 5.18 직전부터 5.24. 오전까지 각자 도망다녔으며, 5.23.에 도청에 들어가려다 카리스마 넘치는 고관들의 제지를 받고 발길을 돌렸다고 일관되게 증언했다. 5.21일의 대규모 군사작전과 900여 민간인들이 동원된 5월 23일의 대규모 장례행사는 광주인들이 벌인 것이 아니라 했다. 5.18기념재단 전 상임이사 김양래는 무장한 군사행위를 보여주는 군사 프로들이 광주인들이 아니었고, 외지에서 온 게릴라부대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2. 현장사진에 담긴 진실
1) 무전기까지 동원한 지휘체계가 획립돼있는, 국제 용병급 수준으로 훈련된 무장괴한들의 수가 수백 명 담긴 수십 장의 현장 시진
5.18기념재단 전 상임이사 김양래까지도 법정에서 “전두환이 투입시킨 게릴라부대로 보인다“고 답함으로써 그 무장한 수백 명이 광주인이 아니고 고도로 훈련된 게릴라부대로 보인다고 대답. 이 무장 부대들이 광주인으로 보인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2) 5.23. 900여명의 민간인 집단이 일사불란한 통제하에 벌인 장례행사 사진 19매
5.21. 오후 5시, 계엄군은 결사적으로 지키던 도청을 무장괴한들에 내주고 시외곽으로 도주했다. 5.23.에는 광주시장도 도망가고 모든 공무원과 경찰이 도망가고 통신 체계도 전면 마비되고, 모든 시민들이 대문 닫고 숨어있던 날이었다. 광주에는 대한민국이 없었다. 이런 날 도청 지역을 배타적으로 점령하여 관들을 날라 진열해놓고, 대성통곡을 하는 등 장례행사를 치르고, 사망자 명단을 민간집단에 보여주는 시나리오에 따라 쵤영한 단체사진이 있다. 당시 광주의 촬영주권은 오로지 시위자 측에만 있었다. 어쩌다 멋모르고 북한 민간 집단 속에 들어갔던 광주인들이 프락치로 지목되어 도청으로 끌려가 즉결처분당했고, 이렇게 즉결처분된 광주시민이 4명 있었다. 이 사실은 미 CIA와 노숙자담요 그리고 매체 [뉴스와논단]에 의해 중복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900여 명은 당시 함참의장과 해군참모총장의 불법적 월권행위에 의해 비워진 목포항 해역으로 유유히 접안한 대형 여객선에 의해 상륙했을 것이고, 이들이 광주로 올라와 시위에 참여한 사실은 미 CIA에 의해 확인되었다. 6.25 직전 군작전을 간첩이 지휘했듯이 5.18 직전에도 합참의장과 해군총장이 세작 행위를 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유병현 회고록 453쪽).
3) 무장 괴한 34명이 김인태, 김중식 등 광주인 4명을 도청으로 연행해가는 사진 5매.
미 CIA 보고서 내용 그대로 극렬분자 34명이 광주사람 4명을 도청으로 잡아가는 사진이 5매 있다. 이중 2매는 해남군민 김인태를 잡아가는 도청 정문 밖 사진과 도청 안 사진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34명이 광주시민이라면 이들은 벌써 살인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기록은 없다. 이들 34명이 광주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것이 된다. 이 증거는 그야말로 빼박증거로, 이제까지 눈을 부라려오던 광주를 막다른 외통수 코너에 몰아넣는 진검이다.
3. A급 정보원(source of information)들의 증언: 550-600명
3개의 A급 정보원의 증언이 100% 일치한다. 미 CIA 보고서는 북과 연계된 극렬집단 규모가 550여 명이라고 했다. 당시 미 국무장관 머스키가 CIA보고서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는 발표를 했다. 대한민국 최상의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권영해가 증언했다. 5.18은 북한이 통일전쟁의 마중물로 주도한 군사작전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북한군 490명이 광주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황장엽-김덕홍 조가 5.18은 북한 대남사업부가 주도한 사업이고, 사건이 끝나자 대남사업부 간부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5.18을 김일성의 지휘 아래 전개했다는 증언이었다. 황장엽은 북한의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책임 비서였다. 이 모두의 증언들은 앞의 활자화된 남북한 문서들과 100% 일치한다.
남북한 문서들에는 다 같이 북한 병력 숫자가 600명인 것으로 활자화돼있고, CIA 보고서에는 북 병력이 550여 명인 것으로 기재돼 있고, 권영해는 그 중 광주에서 사망한 숫자가 490명이라고 했다. 미국, 남한, 북한 정보기관 수장들의 증언 모두가 다 550-600이라는 숫자에 지향돼 있다.
4. 북한개입이 전혀 없었다는 광주 주장의 유일한 근거
1) ”1997년, 대법원이 5.18을 전두환을 내란행위로 규정하여 처벌했기 때문에 북한군이 올 수 없었다.“
2) ”북한군 개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역사인식과 다르기 때문에 허위다.“
5. 다급해진 광주법원의 사기 행위
1) 박남선-지용의 사기
해남사람 김인태를 도청으로 끌고 가는 34명 프락치 색출조(반탐조)에는 71광수와 73광수가 있다. 노담(노숙자담요)은 71광수를 황장엽으로, 73광수를 인민군 대장 오극렬로 감정했다. 그런데 5.18기념재단은 71광수가 황장엽이 아니라 박남선이라 주장케 했고, 73광수가 오극렬이 아니라 지용이라고 주장케 해서 광주법관들로부터 인용판결을 받았다. 이에 나는 이 두 광주사람에게 수천만 원의 배상금을 물었고, 감옥에 갔다.
그런데 이제부터 광주판사들에는 문제가 생겼다. 법왜곡죄을 저지른 것이다, 사진을 보면 71광수는 34명 반탐조를 이끄는 캡틴이고, 73광수는 김인태를 끌고 가 살해케한 살인자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박남선과 지용은 살인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도 영웅행세를 한다. 광주판사들이 법왜곡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광주판사들이 사기를 친 것이다.
2) 심복례 사기
심복례는 80대 후반의 해남 농민으로 김인태의 처다. 노담은 1980.5.23.에 도청 안에 진열돼 있던 관 앞에서 우는 여인을 139광수, 김정일의 첫 부인인 홍일천으로 감정했다. 그런데 5월 재단은 심복례를 내세워 그녀가 139광수라고 주장케 했고, 광주판사는 이를 인용판결했다. 그런데 모든 기록에는 심복례가 남편 김인태의 관을 처음 대한 날이 1980.5.30.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5월 재단에 수천만 원을 물어주고 감옥에 갔다. 광주판사들이 사기-협잡질을 한 것이다.
3) 김진순 사기
김진순은 목포에 사는 90대 노파다. 노담은 5.23. 관 앞에서 눈물짓는 여장한 남성을 3성장군 리을설이라고 감정했다. 그런데 5월 재단은 그 62광수가 김진순이라 주장케 해서 인용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자료에 의하면 김진순이 아들 이용충이 죽은 사실을 처음 확인인 날짜가 1980.6.30.이었다. 6.30에 아들이 죽은 사실을 처음 안 여인이 어떻게 5.23.에 아들 관 앞에 앉아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광주판사들이 황당한 사기를 친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수천만 원을 5.18기념 재단에 뜯기고, 감옥에 갔다. 5.18기념재단이 광수라고 내세웠던 16명 모두가 다 이런 식의 사기-협잡이었다.
결 론
1. 이상은 5.18을 북이 주도했다는 사실 증거들이다. 위 사실 증거들을 실감나게 뒷받침하는 정황증거들은 수백 가지다. 그 중 일부가 스카이데일리 기사이고, 2009년에 탈북군인연합이 발행한 탈북자 수기이고, 내가 발행한 5.18역사서들이다. 반면 북한군이 오지 않았다는 데 대한 증거는 전혀 없다. 광주는 전두환에 대한 대법 판결을 내세우지만, 전두환 내란사건 판결과 북한개입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
2. 2025.10.31. 광주고법은 ”5.18에 10명 규모의 북 공작원은 개입했다고 본다“는 판결을 내렸다. 북한인 10명이 개입했다 해도 북이 개입한 것이 된다. 그런데 위 34명만 해도 10명이 넘는다.
3. 광주 단체, 광주시, 광주법원은 이제라도 솔직히 고백하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
2026.4.11.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