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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자유발언대•1일 전

범죄자 찢죄명 배임죄로 처벌하라

이웃 나라 일본은 브라질산 계란 10알을 206엔, 즉 30알 한 판 기준으로 약 5700원 안팎에 수입하고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 국내산 특란 30개의 산지 도매가조차 5200원에서 6500원 선을 맴돈다. 그런데 이재명과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위대한 식탁 혁명은 이 모든 옹졸한 시장 가격을 비웃듯, 한 판에 무려 3만 9000원이라는 경이로운 수입 원가를 창조해냈다. 브라질의 암탉들이 오직 한국 수출용 계란을 낳기 위해 최고급 스파와 마사지라도 받았단 말인가. 일본보다 7배, 국내산보다 6배 비싼 아마존 럭셔리 계란의 탄생이다. 이 찬란한 무역의 수학적 구조는 실로 눈물겹다. 3만 9000원에 사들인 황금 계란을 마트 매대에서는 4,980원에 떨이로 던져주는 이 웅장한 자선 사업의 배후에는, 국민의 피땀이 서린 축산발전기금 800억 원이 있었다. 수입업자가 가장 비싸게 사 오면 정부가 그 물건을 가장 싸게 팔아주고, 중간에 증발해 버린 3만 4000원의 막대한 차액은 정부 보조금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메워버린다. 이것을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물가 안정이 아니라 국고 슈킹이자 교과서적인 배임이라고 부른다. 특정 카르텔의 배를 불리기 위해 국가 예산을 허공에 태워버린 완벽한 합법적 자금 세탁의 현장이다. 이 기괴한 계란 무역의 전말을 지켜보다 보면,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왜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상법상 배임죄 폐지나 완화를 부르짖었는지 등골 서늘한 퍼즐이 맞춰진다. 국민의 혈세를 동원해 시세의 7배가 넘는 가격으로 해외의 물건을 사들이는 짓을 저지르고도 법망을 빠져나가려면, 애초에 배임이라는 사법적 족쇄 자체를 입법 권력으로 끊어버려야만 했을 것이다. 좌파의 슈킹은 착한 슈킹이라는 그들만의 기괴한 면죄부가 의회의 다수결 폭력을 타고 완성되는 셈이다. 도대체 왜 하필 브라질이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결국 권력의 뒤틀린 세계관 속에서 씁쓸하게 빛난다. 자국 내 상식적인 비판은 좌아하다면서 수용하지 못하면서도 지구 반대편이라도 좌파 정권과는 맹목적으로 연대하는 이념적 굴종이 이 사태의 본질이다. 이재명과 브라질 룰라, 두 사람이 공유한다는 그 애틋한 소년공 서사는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8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국가 예산의 탕진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국민이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가늠조차 안 될 막대한 혈세가 그들의 감성적인 글로벌 좌파 연대를 증명하기 위한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외교의 성과는 찰나의 사진으로 남지만, 부패의 청구서는 국민의 영수증으로 영원히 남는다. 물가 안정이라는 거룩한 핑계 뒤에 숨어 수백억 단위의 검은 차액을 증발시키고, 자신들의 범죄를 덮기 위해 국가의 법률마저 개조하려는 이 파렴치한 탐욕 앞에서,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피 같은 세금으로 저들의 값비싼 우정 사진 관람료를 지불해야만 하는가. - 박주현(디지털 크리에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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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
한컷•2일 전

"5.18은 폭동" 게시글 항소심 무죄 / 대구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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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랭킹
월드 랭킹•5일 전

세계 세탁기 브랜드 매출 점유율 순위 변화 / 출처 그래프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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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쇼 bungae show
번개쇼 bungae show•5일 전

백악관 새로운 금발 대변인 '케이티 재커라이어'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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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
한컷•5일 전

찢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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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팜•홍보됨

"황금과일 황금인생" 골드팜은 과일,채소,곡물등 농산물 전문 브랜드입니다.

번개스포츠
번개스포츠•6일 전

호주에서 시작된 풀 컨택트 충돌 스포츠인 런 네이션 챔피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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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대 칼럼
손상대 칼럼•6일 전

♡ 송학 직격탄 ♡ 《똑똑히 보라!》

92.1%, 84.6%, 81.1% 이게 무슨 수치인지 아시나. 이것은 '이재명 재판 재개가 필요하다'는 설문조사 응답 결과다. 그러니까 30대는 92.1%, 18~29세 84.6%, 40대 81.1%가 이재명 재판 재개하라는 것이다. 나머지 세대까지 포함 한. 전체 세대 평균 응답률이 77.9%다. 이 정도면 사법부가 이재명 재판 재개해야 되는 것 아닌가. 다른 것은 몰라도 젊은 세대가 저렇게 원하는데 안 들어주면 천벌 받을 걸. ♤81건, 36건, 114건 이게 무슨 건수인지 아시나. 이것은 이재명이 요 몇 달 동안 SNS에 올린 글의 통계 수치다. 그러니까 7월 81건, 8월 36건, 9월에 114건의 글을 이재명이 SNS에 올린 것이다. 병적인지, 광적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주변에서 "그만하라" "줄여라"해도 소 귀에 경 읽기다. 오히려 죽은 박원순까지 소환해 SNS 못 끊겠다고 하다가 정의당 공격까지 받은 것 아닌가. 다른 것은 몰라도 김어준, 진중권이가 저렇게 원하는데 안 들어주면 계속 지적질할걸. ♤5월 26일, 7월 12일, 10월 10일. 이게 무슨 날인지 아시나. 이것은 이재명이 들통 난 세 번의 골프 친 날짜다. 그러니까 5월 25일은 서울 서소문 고가차로가 붕괴하며 무고한 시민 3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중상을 입는 끔찍한 참사가 발생한 날. 7월 12일은 강원도 동해안 쪽에서 우리 해군 장병이 실종됐던 날. 10월 10일은 대구 상가 천장 붕괴 사고가 발생한 날이다. 우연인지 하나님 진노하신 것인지 모르지만 이재명 골프 치는 날마다 사고가 발생한 게 아닌가. 다른 것은 몰라도 골프 치다가도 사고 보고 들으면 그만치고 곧바로 청와대로 복귀해야지. 웃기는 것은 앞선 날짜는 끝까지 닭발 내밀더니 10일 날은 왜 가족골프라 스스로 밝혔을까. 옛 말에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원칙 없는 정책추진, 중독형 SNS, 손가락질받는 골프 그만하시라니까. 어제 또 깜방에 있는 이화영이 성탄특사 요구하던데 잠 안 오면 또. SNS 할 것 아닌가. '이-이 트리오'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가 됐을 것 같은데....??? 2026. 10. 13. 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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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
한컷•7일 전

팔X신이 골프에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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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자유발언대•8일 전

🇰🇷전 일본 외교 관 "다나카겐지" 가 한국의 발전 과정을직접보고 회고록으로 쓴 글 요약

*지금 정부에서는 박정희를 지우려고 암살자란 영화까지 만들었지만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습니다 외국인으로 그가 목격한 일들을 증언하고 있으니 좀 길더라도 끝까지 읽으시면 민족주의자 박정희와 한국의 발전상을 확실히 알게 되리라 사료됩니다 그가 처음 한국 땅을밟은것은1965년봄이었습니다. 한일 국교정상화협정 이 체결되던 바로그해였습니다.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가 받은 인상은 지금도 지워지지않는다고 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길거리에는 흙먼지가날렸고 아스팔트도로보다비포장흙길이 훨씬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12년이지났음에도도심곳곳에 허물어진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국민소득은 80달러남짓, 아프리카 가나보다도 낮은수준이었습니다. 일본 외무성 동료들 사이에서 한국은 이렇게 불렸습니다. "아무리도와줘도 스스로 일어서지 못할 나라." 다나카 자신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습니다. 그런데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 보게 된 풍경은 전혀 다른 나라 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전국을 잇고 있었고포항에는 세계가인정하는 거대한 철강 공장이 연기를 내뿜고있었습니다. 울산 바닷가에서는 세계 최대급 유조선이바다로 미끄러져 나갔고 서울 도심에는 고층 빌딩이들어서고 있었습니다. 1965년에 그 흙먼지 날리던 나라가 맞는지 자신의 눈을 의심할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2026년, 그 나라의 반도체 기업들이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부품을 전 세계에공급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한 기업이 전 세계 인공지능서버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의 절반 이상을만들어냅니다. NVIDIA의 그래픽 처리 장치 안에 들어가는메모리도한국산입니다. OpenAI의 ChatGPT가 대답을 내놓을 때마다 그 연산의 핵심을 한국이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나카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적의 씨앗이 어디서뿌려졌는지를. 그것은 경부고속도로만도 아니었고, 한국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훨씬 더 은밀하고 훨씬더결정적이었던 선택들이 있었습니다. 다나카는 만년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나는 한국에 대해 틀렸다. 일본도 틀렸다. 미국도 틀렸다. 세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그들은 해냈다. 이 기록은 내가 직접 목격했던 그 비밀을 세상에 남기는 고백이다." 빗소리가 조용히 서재를 가득채웠습니다. 🔹️1965년 6월 22일, 도쿄 일본총리관저의 한 회의실에서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한일 기본 조약 그리고 대일 청구권 협정. 식민지배 36년에 대한 한국의공식적인 청산이이루어지는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의분위기는 묘하게엇갈렸습니다. 일본 측 외교관들은 속으로안도하고 있었습니다.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의 자금으로 36년의 빚을 정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받아서 뭐라 하겠어요. 먹고 사는 데 쓰다가 다 없어지겠지." 신참 외교관 다나카 겐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조인식 뒤풀이자리에서 선배 외교관이 건넨 말을 아직도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이걸로 한국 문제는 한 세대는조용해질 거야. 저 돈 다 쓰고 나면 또 와서손내밀겠지." 다나카는 그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국 국내 사정은 더 복잡했습니다. 서울 거리에는 협정에반대하는 학생 시위대가 쏟아져나왔습니다. '굴욕 외교'라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채웠습니다. 독립운동의 피 값이 고작 5억 달러냐는 분노였습니다. 야당은 협정 무효를 외쳤고 지식인들은 민족의자존심을 팔았다고박정희를맹비난했습니다. 박정희는 그 모든 비판을 침묵으로 견뎠습니다. 그리고 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용히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청와대 경제참모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결정이었습니다. 세계은행도, 미국 국무부도, 심지어 협정을 체결한 일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선택이었습니다. 제철소를짓겠다는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변변한 철강 공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술도 없었고 인력도 없었고 경험도없었습니다. 세계은행은 한국의 제철소 건립 타당성 조사를의뢰받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은 철강 산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투자대비성과를 기대하기어렵다." 세계은행은 차관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일본 철강 업계의 반응은 더노골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철 업계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제철소를 짓겠다고? 우리도 수십 년 걸린 일인데 지어 봤자 고철 덩어리 될 거야." 그게 일본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었습니다. 다나카도 당시 외무성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고 회고했습니다. "청구권 자금의 제철소 투자 계획은현실성이 희박하며 한국 정부의 무리한 욕심으로 판단된다." 그런데박정희는 멈추지않았습니다. 그는 청구권 자금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이미 마음속에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참모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돈을 먹는 데 쓰면 한 번 먹고 끝이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면 그 공장이 영원히 돈을 만들어 낸다." 철강은 모든 산업의쌀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고, 배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고,건물을 세우려면 철이필요합니다. 박정희는 알고있었습니다. 한국이 진짜 산업 국가가 되려면 제일 먼저 철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없으면 나머지 모든 것이 모래 위의 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포항을 선택했습니다. 바다와 인접한 입지, 원료 수입과 제품 수출에 유리한 항구 조건. 박정희는 이미 지형을 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공장 하나를짓겠다는 게아니었습니다. 한국산업화의 심장부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회고록에이렇게 썼습니다. "그때 우리는 박정희가 단순히 돈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돈이 아니라 나라의 구조를 설계하고있었다. 우리가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늦은뒤였다." 5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이 포항 한 곳에 집중됐습니다. 주변에서는 무모하다고 했고전문가들은 실패를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결단이옳았는지그렇지않았는지는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온 세상이 확인하게됩니다.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포항 영일만 바닷가,갈대밭과모래사장밖에 없던 황량한 해변에서포항제철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직접참석했습니다. 단상에 선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습니다. 축제 분위기라기보다는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의 얼굴에가까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었습니다. 세계은행은 이미 차관을 거부했고 당초 협력하기로 했던 서방 철강 기업들은 하나둘 손을 떼고있었습니다. 자금도 빠듯했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수근댔습니다. "저 나라 망한다." 바로 그 시점에 박정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카드를꺼냈습니다. 일본으로 사람을보냈습니다. 공식 외교 채널이아니었습니다. 조용하고 은밀한방식이었습니다. 박정희의지시를 받은 박태준은 일본 제철 업계의 퇴직 기술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이미 현장 경험을 쌓은 숙련 기술자들, 정년퇴직을 앞두었거나 이미 퇴직한 엔지니어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제안은 단순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제철소를 함께 지어달라." 처음에는 거절이많았습니다.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시절이었고 한국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박태준은 포기하지않았습니다. 설득하고 조건을 높이고 다시 찾아갔습니다. 결국 수십 명의 일본인 기술자들이 포항행을 결심했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이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당시 그는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에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상부로부터이상한보고를 접했습니다. 일본인기술자들이 포항 공사 현장에 다수 투입되어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직접 현장을 확인하러포항으로내려갔습니다. 그가 목격한 장면은충격이었습니다. 공사 현장 곳곳에서 일본인엔지니어들이 언어가 달랐지만 손짓발짓으로, 때로는 쪼그려 앉아 흙바닥에 그림을그려가며 기술을전수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기술자들은 메모지가 부족하면 손바닥에까지 받아적었습니다. 다나카는 그 장면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회고했습니다. 경쟁심도아니었고 적대감도 아니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감정이었습니다.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싸워온(쌓아온) 기술이 바로 코앞에서 다른 나라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일본인들의 손으로 직접.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의 계산이었습니다. 단순히 설계도를 가져오는것으로는부족했습니다. 철강 기술은 도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물을 다뤄본 사람의 몸 안에 있는것이었습니다. 수천 도의 열기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설비가삐걱거릴 때 어디를 먼저 봐야 하는지, 그것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그것을알았습니다. '기술은 사람 안에 있다. 그러니 사람을 데려와야 한다.' 포항제철현장에서 한국인 기술자들은 단순히 일을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인 기술자 한 명이 한국인 기술자 서너 명을밀착지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됐습니다. 일본인이 떠나고 나면 그 기술이 한국인 몸속에 완전히 남아 있도록 하는구조였습니다. 박태준은 이것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는 세상을 놀라게했습니다. 1973년 포항제철 1기 설비가완공됐을 때 전 세계 철강 전문가들이 경악했습니다. 세계은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제철소가 예정보다빠르게, 높은 품질로 완공되자 철강 업계관계자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말을 잃었다고합니다. 다나카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기술을 흉내 낼 것이라고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기술을소화했다. 흉내와 소화는 전혀 다른 것이다. 흉내는 따라 하는 것이고 소화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포항에서 나는 그차이를처음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박정희가 포항제철에서 실험한 이 방식, 즉 외국의 기술자를 불러 현장에서 함께 일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기술자가 기술을온몸으로 흡수하게 하는 방식은 이후 조선, 자동차, 전자 산업으로 그대로이식됩니다. 그리고 훗날 반도체산업에서도 같은 방식이 반복됩니다. 오늘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정상에 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천재가 나타나서 이룬 일이아니었습니다. 포항 영일만 해변에서 한국인기술자가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펜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다음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아직 써야 할 이야기가 훨씬 더남아있었습니다. 🔹️1973년 1월 서울,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 선언을발표했습니다. 철강에 이어 조선, 자동차, 기계, 전자, 화학까지 한국이 이 모든 산업을 스스로 일으키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발표가 나오자마자 서울 주재 외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다나카도 그 자리에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기억했습니다.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직 포항제철도 완공되지 않은 나라가 무슨 중화학공업이냐는반응이었습니다. 워싱턴의 반응은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즉각 우려를표명했습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자할 경우 재정 불균형과 인플레이션이 심해져 경제 전체를불안정하게만들수있다는 경고였습니다. 세계은행도 같은 목소리를 냈습니다. "한국의 비교 우위는 저임금 경공업에 있다. 중화학공업은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다." 일본의 속내는 더복잡했습니다. 다나카는 당시 외무성 내부에서 오간 전문 내용을 회고록에서 조심스럽게 언급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무리한 산업화 계획에 우려를표했지만, 실제로는 전혀다른이유가 있었습니다. 한국이중화학공업에성공한다면 일본의 핵심 수출 산업과 직접 경쟁하게 된다는위기감이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최대 수출 산업 중 하나였고 철강과자동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이 잘 되면 일본에 위협이 된다.' 외교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속내가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박정희는 이 모든 압박을 정면으로 무시했습니다. 그에게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경공업으로는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발과 가발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 봤자 그것은 영원히 하청일 뿐, 스스로 공장을 짓는 나라가 되어야했습니다. 박정희가 당시 경제 참모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의 충고를 듣고 부자가 된 예는 역사에 없다."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아니었습니다. 이미 포항제철에서 검증된자신감이었습니다. 세계은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던포항제철이 완공됐습니다. 일본이비웃었던 한국기술자들이 쇳물을뽑아냈습니다. 박정희는 그 경험에서 하나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반대는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뚫고 나가야 할 장벽이다.' 중화학공업화는 속도전이었습니다. 울산에는 현대조선소가 들어섰습니다. 허허벌판이었던 울산 미포만이 세계최대조선소 부지로변해갔습니다. 거제에도 조선소가 건설됐습니다. 창원에는기계공업 단지가 조성됐고 여수에는석유화학 단지가 세워졌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사판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이 시기를취재하기 위해 남부 공업지대를 직접순회했습니다. 포항은 일본의 도움이라도 받았습니다. 그런데현대조선소는달랐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배 한 척 만들어 본 적 없는 상태에서 영국의배주문을 먼저 따내고 조선소 건설을 나중에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받아놓고 공장을 지은 것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이 사실을 알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오직 무서운 배짱과속도로만 가능한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짱 뒤에는 박정희의지원이 있었습니다. 정부가 금융을 밀어줬고 인력 양성을지원했으며 외교적으로 수출 시장을 개척해줬습니다. 국가가 기업의 등을 밀고 기업이 세계 시장으로 뛰어드는 구조. 다나카는 그것을 보면서 처음으로두려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산업화가아니다. 이들은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반대했던 중화학공업 선언 후 1980년대 한국은 세계 5위권의 조선 강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조선업계는 한국의 물량 공세에 밀려 시장을 내주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의 경제학자들은 한국 사례를 설명할 새로운 이론을 찾아야 했습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은 한국이아니었습니다. 조언을 건넸던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1977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제23회국제기능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기능올림픽은 전 세계 청년 기능인들이 용접, 선반, 전자, 배관, 자동차 정비 등 수십개직종에서 기술을 겨루는 대회입니다. 올림픽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당시 국제사회에서 그다지주목받는 행사는아니었습니다. 선진국들도 형식적으로 참가하는수준이었고 언론의 관심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상식이 끝나고 난 뒤 대회 관계자들 사이에서이상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이 또 1위를 했다." '또'라는 표현이 핵심이었습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이미 우승을 수년째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압도적인 점수 차로.선진공업국들인 독일, 일본, 스위스를 제치고 한국 청년들이금메달을 쓸어담고 있었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해마다 일본 대표단의참관인 자격으로 위트레흐트에 와 있었습니다. 시상대에태극기가 올라가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처음에는 단순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한국이 왜 이 대회에서 이렇게 강한 것인가?' 그런데 귀국 후 조사를 해보니 단순한 의문이충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국제기능올림픽을국가전략으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대회가 열리기 수년 전부터 전국의직업훈련원과공업고등학교에서 선수를 발굴하고 합숙 훈련을 시키고 국비로지원하는 시스템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금메달리스트에게는병역혜택이 주어졌고 귀국 후에는 대기업 특채가보장됐습니다. 기술자가 영웅 대접을 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정희의 구상이었습니다. 당시대한민국은 기능올림픽을 진짜올림픽처럼 대했습니다. 금메달리스트가 귀국하면 카퍼레이드가 열렸습니다. 청와대에초청되어 대통령과 악수를나눴습니다. 신문 1면에 얼굴이실렸습니다. 대학 진학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던시대에 박정희는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메시지를 온 나라에 던진 것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이 구조를파악하고 나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대회준비가 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기능올림픽을 통해 두 가지를 동시에달성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실제 산업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최적의 기술 인력을전국적으로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것, 또 하나는 기술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기술자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공부 못 하면 공장 간다"는 말이공공연하게 쓰이던시절이었습니다. 박정희는그인식을 뒤집으려 했습니다. '국가가기술자를 영웅으로만들면 젊은이들이 기술을선택한다. 젊은이들이 기술을선택하면 공장이돌아간다. 공장이 돌아가면나라가 산다.' 그것은 단순한 포상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인력을설계하는 국가전략이었습니다. 다나카는 귀국 후외무성보고서에 이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한국의기능올림픽 전략은 단순한 대회 성적 관리가 아니다. 이것은 산업 인력 양성 시스템의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은 지금 미래의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미래의 기술 엘리트를 키우고 있다." 그 보고서는 외무성 서랍 속에서잠들었습니다.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다나카는 알았습니다. 기능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스무 살 한국 청년들이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자리에 서 있을지를.그들이 포항제철의 현장 공장장이 되고,현대조선소의기술책임자가 되고, 그리고언젠가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공정엔지니어가 될 것이라는 것을.기능올림픽 금메달이 반도체공장으로 이어지는 그 길을 박정희는 1970년대에 이미 닦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정상에 선 배경에는 수십 년에 걸쳐 손기술을연마한 수만 명의 현장 기술자들이 있습니다. 그 기술자들이 어떻게만들어졌는지를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의 기적은 영원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나카는 그것을위트레흐트시상대앞에서 처음으로어렴풋이감지했습니다. 태극기가 올라가는시상대를 바라보며 그는 조용히 수첩을 꺼내 한 문장을적었습니다. "한국은 지금 사람을 만들고 있다." 🔹️1971년 봄 서울, 박정희 대통령은조용히 하나의 결정을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포항제철 기공식이 열린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제철소 건설에 매달려 있던 그때, 박정희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있었습니다. 쇳물을뽑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있었습니다. 쇳물을 설계하는 사람, 공장을설계하는 사람,산업자체를 설계하는 사람이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학원, 훗날 카이스 트(KAIST)로 불리게 될 기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겉으로보기에는 그저 대학원 하나를 세운 것처럼보였지만 들여다보면 전혀달랐습니다. 카이스트는 처음부터 일반 대학과 다른 원칙 위에 세워졌습니다. 등록금 전액 면제, 생활비 지원, 병역 혜택, 미국 수준의 연구 환경. 당시 한국 어디에도 없던조건이었습니다. 박정희의 목표는단하나였습니다. '미국에 나가있는한국인 과학자들을 데려오는 것.'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스탠퍼드대학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등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 이공계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국에는변변한 연구 장비도 없었고연구비도 없었으며 안정된 지위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그 조건을 통째로 바꿨습니다. 직접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미국 현지에서 한국인과학자들을개별면담했습니다. 설득이 쉽지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내건 조건이 너무 좋아서 오히려 믿기 어려웠던것입니다. 실제로 귀국한 과학자 중 일부는 약속이지켜지지 않을것을고려해 미국 영주권을 유지한 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박정희는 약속을지켰습니다. 카이스트 초대교수진에는 미국 유수 대학에서 연구하던한국인 박사들이 대거 포함됐습니다. 연구실에는 당시 한국 일반 대학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최신 장비가들어왔습니다. 정부가 직접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 학생들은 전원 장학금을받으며 오직 연구에만 집중할수있었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카이스트 설립 소식을 외무성 보고서를 통해 뒤늦게접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개발도상국들이 흔히 하는 이공계 대학 설립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카이스트 출신 연구자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투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나카의시각이 달라졌습니다. 포항제철의 공정 개선에 카이스트 출신 연구자가 투입됐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엔진개발팀에도 같은 흐름이 이어졌습니다. 단순히 외국 기술을 따라 하는것이아니라 스스로개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기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회고록에이렇게 썼습니다. "포항제철이 한국의 손을 만들었다면 카이스트는 한국의 머리를 만들었다. 손과 머리가결합되는 순간 한국은 더 이상 따라가는 나라가아니었다." 그 말은 단순한 수사가아니었습니다. 카이스트 졸업생들은 이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현대자동차 기술연구원, 포항공과대학교 등으로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이 쌓은 연구가 한국 산업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씩끌어올렸습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 반도체를양산하고SK하이닉스가 전 세계 인공지능서버에 들어가는고대역폭 메모리를 독점 공급하는 배경에는 이 인재들의계보가 있습니다. 그 계보의 뿌리가 1971년 봄 박정희의결단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회고록을쓰면서 한 가지 사실에 새삼 놀랐다고 했습니다. 박정희가 카이스트를 세운 것은 포항제철기공식 이듬해였습니다. 중화학공업 선언보다도 2년이나 앞선 시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공장을 짓기 전에 공장을 움직일 인재부터 만들고있었습니다. 보통의 지도자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짓습니다. 도로를 깔고 공장을 세우고 건물을올립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먼저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머릿속에들어가는 지식과 기술, 그것이 수십 년 뒤에 가장 강력한 국가 자산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나카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주재하던 시절 박정희를 독재자로만 봤습니다. 철권통치, 유신헌법, 언론 탄압,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은 다른 눈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의 손을 키우고, 아무도믿어주지 않는 두뇌들을 불러 모으고, 아무도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조용히설계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한 사람 안에 있었다는 것이 다나카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부분이었습니다. 🔹️1979년 가을 도쿄,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해있었습니다. 14년, 그가 한국에 머문 시간이었습니다. 서른도 안 된 청년외교관으로 첫발을 디뎠던 나라를 마흔 중반의 나이에 떠난것이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아시아 담당 과장으로근무하게 됐습니다. 업무 중 하나는 한국의 산업 동향을지속적으로 파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보고서를 검토하면할수록 다나카는 이상한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가 예상과 달랐습니다. 아니,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일본철강업계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포항제철이 단순히 일본산 철강을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품질과 가격 양쪽에서 일본 제품을압박하기 시작한것이었습니다. 조선업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조선과 대우조선이 일본조선소들의 수주 물량을 빠르게 잠식해 가고있었습니다. 일본이 수십 년에걸쳐구축한 시장 지위가 불과 몇 년 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나카가 더 주목한 것은 따로있었습니다. 일본의 산업 구조를참고하되 한국의방식으로 재설계하고있다는느낌이보고서곳곳에서 감지 됐습니다. 일본은 산업을 키울 때 수십 년에걸쳐단계적으로올라갔습니다.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중공업에서 첨단 산업으로, 한 단계를 충분히 소화한 뒤에다음단계로 넘어가는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상식이었고교과서였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단계를압축했습니다. 경공업과 중공업을 동시에밀어붙이면서 이미 전자 산업과 반도체 산업의 씨앗을 뿌리기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키운 연구 인력이 반도체 분야에투입되기 시작했고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선언했습니다. 1970년대 말의일이었습니다. 다나카는 당시 작성한 내부 보고서 초안을 회고록에서 언급했습니다. "한국은 현재 일본산업구조의 복사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일본이 올라온 계단을더빠르게, 그리고 더 넓게 오르려 하고 있다. 특정산업분야에서일본을추월하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 그 보고서는 상부에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외무성 분위기에서 그런 내용은 지나친비관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설마한국이 …'라는 정서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초안을 서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30년이 넘도록 꺼내지지 않은 채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초안대로 흘러갔습니다. 1983년삼성전자가 64K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에 한국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일본 반도체 업계는 처음에 코웃음을쳤습니다. 그러나 그 코웃음은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일본을추격했고 결국추월했습니다. 다나카는 그 과정을도쿄에서 지켜봤습니다. 그가가장충격을 받은 것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기술을만들어낸 사람들의 정체였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의 기술자들이 현장 공정을 이끌고있었습니다. 포항제철에서 쇳물을 다뤘던 경험이 반도체 공장의 정밀 공정 관리로 이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따로따로존재하는것이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설계 아래 연결된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설계를 그린 사람이박정희였습니다. 다나카는그제야 이해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두려워한 이유가 단순히 한국이 잘 따라와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일본이 진짜 두려워한 것은 한국이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따라오는 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앞서가기 시작한 나라, 그것이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한국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서랍에서 꺼낸 30년 전 보고서 초안을 다시 펼쳐봤습니다. 빛바랜 종이 위의 문장들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진행됐습니다. 그는 그 초안을회고록의 마지막부록으로 첨부하기로 했습니다. 30년 전에 상부에 올리지 못했던그문장들을 이제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2019년 가마쿠라, 비가 완전히그쳤습니다. 서재창문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비스듬히 들어왔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책상 위에 펼쳐진 원고지 묶음을바라봤습니다. 몇 달에 걸쳐 써 내려온 회고록이었습니다. 빽빽하게 채워진 글자들, 그 안에는 그가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만남았습니다. 다나카는 만년필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는외교관이었고 평가는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76세의 나이에 이르러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솔직한 판단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쓰기시작했습니다.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그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않는다. 자유를 억압했고 반대자를 탄압했으며 헌법을 자신의 뜻대로바꾸었다. 그것은 역사가기록해야 할 과오이고 피해자들이 잊어서는 안 될 상처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도 사실이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나라를 믿었다.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는 가능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이 반대했을 때 전문가들의 논리를넘어섰다. 철모를 다루는 기술자를영웅으로 만들었고 두뇌를 가진 과학자는조국으로불러들였으며 손과 머리가 함께 움직이는 나라를설계했다. 그 설계가 오늘의대한민국이다." 다나카는 펜을 멈추고 잠시 눈을감았습니다. 창밖 멀리서 바람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마쿠라의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바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바람소리를 들으며 오래전 포항의영일만을 떠올렸습니다. 갈대밭과 모래사장뿐이던 황량한 해변, 그곳에서 기공식 단상에 서있던박정희의 굳은 표정, 그리고 몇 년 뒤 그 자리에 우뚝 솟아오른거대한 용광로의 붉은 빛. 그 장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다나카는 다시펜을들었습니다. 그리고 회고록의 진짜 마지막 문장을 적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14년을 살았다. *처음에는그나라를 얕보았고, **나중에는두려워했으며, ***마지막에는 존경하게되었다. 한 나라가 한 세대 만에 이런 일을 해낸다는 것이가능하다는 것을나는한국을 통해 처음으로 배웠다." 만년필이원고지 위를마지막으로 미끄러졌습니다. 다나카는 원고를덮었습니다. 그리고 책상 위의낡은봉투를 집어 서랍 안에 다시넣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회고록 안에 모두담겼습니다. 세상에 내놓을 준비가 됐습니다. 그는 창가로걸어갔습니다. 저녁 햇살 속에가마쿠라의 지붕들이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손녀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 🇰🇷한국이 왜 이렇게 잘 살게 됐어요?" 이제그는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하루아침에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포항 영일만 해변의 흙먼지 속에서시작됐습니다. 일본인 기술자의손짓을 손바닥에받아적던 한국인 기술자의 땀 속에서자랐습니다. 위트레흐트 시상대에서 태극기를 바라보던 스무 살 청년들의 눈빛 속에서 단단해졌습니다. 미국에서 영주권을 손에 쥔 채 조국으로 돌아온과학자들의 결단 속에서 꽃을피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세계인공지능 서버 안에서 한국이 만든 반도체가 쉼 없이 연산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라는 이름 앞에는 반드시물음표가 따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의 공과는 하나의 자로 잴 수 없습니다. 그러나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무도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을 때그는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그선택들이 50년 뒤에 결실을맺었습니다. 오늘이이야기를 들으신여러분께 한가지여쭤보고 싶습니다. 만약 그시절여러분이 그자리에있었다면, 세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겠습니까? 전문가들이 반대하고우방국이 만류하고 국내에서도 반발이 쏟아질 때 그 외로운 결단의 자리에 섰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오늘 '해외 감동사연'에서는 전직일본외교관 다나카 겐지의 시선을 빌려 아무도주목하지 않았던박정희의 네 가지 결정적 유산을살펴봤습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 5억달러를 소비가 아닌 포항제철이라는 산업의심장으로 만든 결단 🔹️기술을 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기술자를 직접 불러들여 한국인의 몸에 이식한 방식 🔹️국제기능올 림픽을국가전략으로 운영하며 손으로 일하는 기술자를영웅으로 만든 인력 설계 🔹️공장을 짓기 전에카이스트를 먼저 세워 미국 유학파과학자들을 불러들인 50년짜리 두뇌 설계 이 결정들이 오늘날 전 세계 인공지능시대를 이끄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뿌리가됐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시작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 발전을 직접 보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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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자유발언대•10일 전

국방의 의무 조롱한 금메달, ‘하늘의 큰 별’ 팻 틸먼에 부끄럽지 않은가

위국헌신의 가치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다. 과거 미국프로풋볼(NFL) 애리조나 카디널스의 스타 선수였던 팻 틸먼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부와 명예가 보장된 수백만 달러의 연봉 계약을 뒤로한 채, 9·11 테러 직후 미 육군 레인저에 자원입대했다. 의무 복무기간이 끝난 후 NFL로 복귀할 수 있었음에도 최전선 아프가니스탄 전장을 계속 지켰던 그는 2004년 4월 22일 작전 중 만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팻 틸먼은 반짝이다 사라진 별이 아니라 영원히 미국인들에게 기억될 하늘의 큰 별이 되었다. 그가 남긴 고결한 위국헌신의 정신은 여전히 미국의 자부심이자 군사 강국 미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엘리트 체육인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의 숭고한 가치와 명예를 바닥까지 추락시켰다. 이민성 감독이 이끄는 한국 U-23 남자 축구대표팀은 2026년 10월 3일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고 대회 4연패를 달성했다. 이로써 20명의 젊은 선수가 병역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승리의 환호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터져 나온 일부 선수들의 경솔한 언행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공식 석상에서 "메달보다 군 면제라는 보상 하나만 보고 뛰었다"고 공공연히 밝힌 양민혁이나, "이제 군대에 안 간다"며 국방의 의무를 마치 기피해야 할 형벌처럼 조롱한 이기혁의 실언은 국가대표라는 자리가 지닌 무게를 망각한 처사였다. 아직 군대를 경험하지도 않은 신분으로 예비군 모자인 '전역모'를 쓰고 라커룸에서 거수경례 사진을 올린 박승수의 철없는 행동 또한 군 복무 중인 수많은 청년의 헌신을 가볍게 여기는 오만함에서 비롯됐다. 무엇보다 국민적 분노를 폭발하게 만든 것은 수비수 최우진이 SNS에 게재한 다리 절뚝이기 퍼포먼스이다. 그 시점이 너무나 잔인했다. 불과 십여 일 전인 2026년 9월 21일 오전 10시 51분경, 경기도 파주시 비무장지대(DMZ) 서부전선에서 북한 지뢰 폭발 사고로 제25보병사단 수색대대장 조청완 중령이 발목을 잃는 참변이 있었다.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키다 피를 흘린 장병들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병역 특례를 확정 지은 선수가 다리를 절뚝이는 연출로 메달을 자랑하는 모습은 의도 여부를 떠나 부상 장병과 국군 전체를 향한 모욕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군 희화화와 풍조의 밑바닥에는, 군의 기강과 명예를 앞장서서 지켜야 할 정치권과 고위 공직자들의 자격 미달 행태가 자리 잡고 있다. 탈영 의혹을 받았던 방위병 안규백이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던 것과 군 복무 시절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진성준이 국회 국방위원장이라는 것이 이런 참담한 현실을 증명한다. 군 경력과 전문성, 그리고 도덕성이 결여된 이들이 국방의 수장 자리를 넘보는 구조 자체가 대한민국의 안보 의식을 총체적 파국으로 이끈 주범이다. 한국 지도자들은 군을 '시간 낭비하는 곳', '빽 없으면 가는 곳'으로 격하시켰고, 이것이 청년들에게 군 기피를 당연시하는 문화를 심어준 것이다. 이스라엘처럼 전 국민이 군을 예우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국가들과 비교하면, 대한민국의 현실은 부끄러움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군을 희화화하는 사회는 위기 상황에서 결코 청년들의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을 이끌어낼 수 없으니 대한민국의 미래 안보가 걱정스럽다. 안철수, 나경원 등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아시안게임 병역 특례 제도의 폐지 및 전면 재고를 촉구하고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리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반세기 전에 도입된 낡은 병역특례 제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국방의 의무를 신성하게 여기게 만들고 사회적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때다. 팻 틸먼은 최고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삶을 내려놓고 국가를 위해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도 군 복무가 단순히 피해야 할 부담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감당하는 명예로운 책임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금메달은 영광이다. 그러나 그 영광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청년들의 헌신 위에 서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 토니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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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C 치킨•홍보됨

`이제,무게로 먹는다` UFC chicken.

축제의 현장
축제의 현장•11일 전

안동전통주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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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자유발언대•11일 전

🚨 현대·삼성 美 대탈출

현대차그룹이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에 36조 원을 쏟아붓는다. 삼성은 텍사스주 테일러에 30조 원을 투자한다. 합치면 66조 원이다. 대한민국 1년 국방예산보다 많은 돈이 미국으로 빠져나간다. 어용언론은 "글로벌 기업의 성공"이라 포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는 대한민국 제조업의 대탈출이다. 이재명 정권이 기업들을 다 쫓아내고 있다. 노란봉투법과 민노총 횡포, 그리고 반기업 규제가 대한민국을 좀비국가로 만들고 있다. 현대차 미국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 국내 생산물량은 연 30만 대 규모로 줄어든다. 자동차산업연구소는 국내 고용 1만 명 이상 감소를 경고한다. 울산공장 가동률이 떨어지고, 협력업체들은 구조조정 칼날 앞에 서게된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텍사스 반도체 공장 증설로 국내 협력사들은 이미 피를 흘리고 있다. 2024~2025년 반도체·전자업계에서 2,500~3,000명이 실제로 짤렸다. 경기·경북 공단은 매출 역성장에 신음하고 있다. 이게 이재명이 자랑하는 경제 성과인가? 지방은 더 심각하다. 경북 구미, 충남 천안·아산의 부품업체들은 공장 문을 닫고 있다. 인구는 빠져나가고 상가는 텅 비었다. 군산을 기억하는가? GM이 떠나자 군산은 하루아침에 좀비도시가 됐다. 이제 구미와 천안, 울산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현대차가 떠나면 울산은 끝이다. 포스코가 떠나면 포항은 끝이다. 이재명은 이 참상을 보면서도 노란봉투법을 밀어붙혔다. 기업을 옭아매고, 민노총에 칼자루를 쥐여주었다. 문제의 핵심은 이재명 정권의 반기업 광풍이다. 노란봉투법은 기업의 파업 피해배상을 제한하고, 불법 쟁의권을 확대한다. 민주노총과 민노총은 이 판국에도 6% 임금 인상을 외치고 자빠졌다. 현대차 울산공장은 멈추고, 삼성 협력사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기업들은 묻는다. "왜 우리가 이 지옥 같은 나라에 남아야 하나?" 고용총량제, 상생협력 의무, 상법·공정거래법 규제까지. 이재명 정권은 기업을 범죄자 취급한다.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을 보고 투자 손사래를 친다. 국내 기업들도 대탈출 준비에 여념이 없다. 경제계는 절규한다. "노동환경이 지나치게 경직됐다. 정부 규제는 글로벌 투자 환경에 역행한다. 경쟁국보다 인건비가 더 오르면 기업은 다 떠난다." 맞는 말이다. 🇯🇵 일본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 규제를 푼다. 동남아국가들 특히 베트남, 인도도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다. 그런데 이재명 정권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기업을 조인다. 민노총을 받든다. 노조 귀족들은 연봉 1억을 받으며 파업을 주도하고, 중소기업 사장들은 빚더미에 앉아 목을 맨다. 이게 나라인가? 중장기 재앙은 이미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붕괴로 연 0.3~0.5%p 성장률 하락을 예상하고 있다. 중소 협력업체는 줄도산하고, 청년 일자리는 증발하면서 캄보디아 고액 알바 미끼에 현혹되고 있다. R&D 투자는 끊기고, 첨단산업 혁신역량은 바닥을 치고 있다. 요즘은 좌파들조차 불안해 한다. 미국으로 몰려가는 기업들, 국내 산업·일자리 보호는 어떻게 하나? 미국정부의 파격적인 규제완화와 글로벌 관세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기업들이 앞다투어 미국에 투자하고 공장을 이전하므로 제조기반 생태계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 현대차와 삼성전자 미국 현지화로 국내 일자리 타격 불가피해졌고, 이러한 문제는 좌우 가릴 것 없이 모두 불안해 하고 있는데, 이재명만 귀를 틀어 막고 있다. 이재명은 반기업 광풍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가속 페달을 밟는다. 민노총은 임금 인상과 파업으로 기업을 압박하고, 정부는 규제로 숨통을 조이고 있다. 기업들의 해외이전으로 벌써 20조가 넘께 빠져나갔다. 현대차는 조지아로, 삼성은 텍사스로, 포스코는 미국 철강업체를 인수하며 살길을 찾는다. 남은 것은 텅 빈 공장과 실업자뿐이다. 구미는 좀비도시가 되고, 울산은 군산을 따라가고 있다. 이재명 정권 5년이면 대한민국 제조업은 전멸하고 대한민국은 망한다. 해법은 명확하다. 정권교체다. 이재명을 끌어내리고, 친기업 보수 정권을 세우는 것만이 답이다. 노란봉투법을 폐기하고, 민노총을 해체하며,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 기업이 돌아와야 일자리가 생긴다. 공장이 돌아야 지방이 산다. 투자가 들어와야 청년이 일자리를 얻는다. 이게 상식이고, 이게 경제다. 이재명 정권은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다. 제조업을 죽이고, 지방을 좀비로 만들며, 청년의 미래를 빼앗고 있다. 이 정권을 하루라도 더 놔두면 대한민국은 회복 불가능한 늪으로 빠진다. 정권교체만이 살 길이다. 하루빨리 이재명 재판을 속개하자. 🇺🇲 미추홀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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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자유발언대•11일 전

(영화때문에 시끄러우니까 지인이 보내왔어요. 전에도 본 적 있는 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이 글을 읽었습니다. ========================== <한국이 잘살게 된 지나온 근대사> 오늘 박정희 대동령이 탄생한지 107주년이 되는 성군의 생신을 기념 하고 축하하는 날에 하늘이 내리신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5000년 동안이나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억압 받고 수탈 당해서 세계 에서 가장 못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를 이렇게 빠르게 부강한 선진국 으로 만드셨는지 수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슬기롭게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성공시켰는지 그런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는 또 어떤 나라 였는지, 그 분의 애국 애족의 정신과 타고난 천재적인 지혜와 그리고 영웅적인 지도력을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기억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저는 1961년 5.16군사 혁명정부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에 행정관 으로 보직을 받고 공직 생활을 처음 시작해서 18년동안 그 분을 모시고 공직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최고회의는 혁명 주체인 군 장교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살기가 등등 했습니다. 그 속에 민간인 은 나혼자였고 혁명군 장교들이 국민복을 입은 나를 보는 눈빛은 예사 롭지가 않았습니다. 박정희 장군은 어떻게 군사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했고 목적이 무엇 이었는지 혁명과업을 어떻게 성공시켰는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어려웠던 일들을 그분을 18년 동안 모시고 공직생활을 했던 제가 옆에서 보고 느꼈던 세상에 잘알려지지 않은 어려웠던 일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오늘 그 분에 대한 애국심과 애민정신 을 같이 추모하고자 합니다. 5.16 군사혁명의 배경 1961년 5.16 군사혁명 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번째로 제일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국민은 먹을 것이 없어 들판에 나가 나물을 캐고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다 삶아먹고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겨우 보릿고개를 넘겼습 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곳이 업었습니다. 와중에 북한 괴뢰집단은 호시탐탐 무력남침을 획책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돈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있는 군장비도 변변치 않았고 나라는 데모 천국 이 되어 혼란에 빠져 있었고 군인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군장교들의 정군운동 이를 본 육군사관학교 8기생 엘리트라고 하는 김종필·김형욱·오치성·길재호·옥창호 등 11명이 대표가 되어 당시 현석호 국방부 장관에게 부패한 정군의 계획을 건의 하려고 갔다가 면담을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실망을 한 대표장교 들은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부패한 민주당 정권 자체를 제거하는 거국적인 무력혁명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 5.16 군사혁명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혁명 거사 계획을 4번이나 변경 이들은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박정희 소장을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국내외의 경제·사회·문화, 특히 농촌경제 문제의 특수성 등에 관한 방대한 자료 수집과 민족중흥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정부 형태를 준비 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주측으로 민족의 영원한 장래를 위해 1960년 5월8일 군사 혁명을 하기로 거사일을 정했다가 4.19학생혁명 으로 거사가 중지되었 습니다. 해병대 단독 거사를 계획 4.19학생혁명으로 거사가 중지된 후에 해병대 내에서도 군 인사에 불만을 가진 해병 장교들이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을 중심으로 해병대 창설 기념일인 4월15일 해병대 단독 으로 거사를 하기로 정했 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장군의 혁명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안 후 해병대 자체 계획은 또 불발이 되었 습니다. 5.16 한국 군사혁명 그 후도 박정희 소장은 혁명 거사일을 3번이나 연기한 끝에 드디어 1961년 5월12일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제5사단장 채명신 준장과 혁명동지회 김종필·김형욱·오치성·길재호·옥창호 등 11명을 만나 거사일을 5월16일 새벽 3시로 확정을 합니다. 이렇게 군에서 혁명 거사일을 4번이나 변경 하는 동안 장면 정부나 군 수뇌부에는 기밀이 많이 알려 있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하고 제지 할 의지도 힘도 없었고, 국가나 국민은 당연한 일로 군사혁명을 받아 들이고 있었습니다. 혁명군은 드디어 5월 16일 새벽 3시에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제6관구 사령부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한강다리를 건넜습니다. 마침내 혁명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로 국가 3권을 장악한 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위원장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 했습니다. 이것이 혁명정부 국가재건 최고회의 입니다. 그리고 혁명 제1성에서 “우리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 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궐기한 것이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 유엔헌장을 준수한다. 지금까지 사회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해서 새로운 기풍을 진작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 하고 국가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한다.” 이렇게 혁명공약을 발표 했습니다. 이와같이 혁명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도탄에 빠진 국민에게 하늘같은 희망을 불어넣게 되었 습니다. 국가 3권을 장악하고 혁명에 성공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은 맨 먼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구하고 경제개발 계획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우리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 했습니다. 그러나 캐네디 대통령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인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받은 박정희 의장을 좋지 않게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원조로 먹고사는 나라에 무슨 돈을 꿔줄 수 있는가 하고 박정희 의장 일행을 만나주지도 않고 문전박대를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만나지 못한 박정희 의장 일행은 숙소에 돌아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복받쳐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가장 믿었던 미국에 가서 문전박대를 받은 박정희 의장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목이 메었습니다. 고심 끝에 우리 민족역사 에 처음으로 서독 상업 차관 낙심하던 박정희 의장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 하고 있는 서독을 생각 하게 됩니다. 우리처럼 분단 국가의 아픔과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을 보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우리의 사정을 호소해 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서독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뤄보자’ 라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혁명정부는 19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단을 구성해서 서독 으로 보내기로 결정 합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어 통역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알아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유학생 으로 서독 뉘른베르크 에를랑켄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와 연락이 되어 사절단의 통역관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사절단이 서독에 도착은 했으나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단이 왔다고 누구도 만나주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옆에서 본 백영훈 박사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2년 후에 서독 총리가 됨) 재무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가서 장관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61년 12월 11일 우리 사절단은 마침 내 루트거베스트리크 재무차관을 만나게 되었고, 그 다음날 에르하르트 재무장관을 만나서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약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얻는데 합의를 했습니다. 사절단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신인도가 없는 나라에 지급보증을 해주겠다고 하는 나라는 세계에 어디도 없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협상이 물거품이 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 광부·간호사 인력 진출 못 사는 나라의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있을 때 백영훈 박사에게 구세주 같은 독일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노동부 과장으로 재직 하고 있는 슈미트라는 독일 사람이었습니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너희 나라는 길거리에 실업자가 널려있다고 하던데”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지하 1000m 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지열이 뜨거워서 파키스탄·터키(투르키예) 노동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혹시 한국에서 광부 약 5000명 정도, 간호조무사 약 2000명 정도를 보내줄 수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하고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백영훈 박사는 신응균 당시 주서독 한국대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고, 대사는 즉시 한국정부에 전문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바로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그래서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려 와서 6대 1의 경쟁률이 되었는데, 선발 자격이 2년 이상 경력자였지만 실은 30%가 대학 졸업자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 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고국 가족에게 송금을 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 로 그때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의 2%에 달한 큰 돈입니다. 이렇게 해서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는 7932 명이고, 간호사는 1만226명으로 집계되어 있습니다. 독일에 취업한 광부·간호사 월급을 담보 이렇게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크 방크를 통해서 한국에 송금되었으며 코메르크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우리 민족 역사이래 처음으로 외국차관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 돈이 오늘의 경제·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종자돈이 된 것입니다. 이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에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독 국빈방문 서독 정부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광부를 보내 주고 간호사를 보낸 한국에 고마움을 표시 하는 마음으로 한국 대통령을 국민방문으로 초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서러움은 다시 계속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통령 전용기는 고사 하고 비행기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미국 노스웨스트 항공기 를 1대 전세 계약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미국으로부터 항공기를 빌려줄 수 없다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원조로 먹고 사는 가난한 나라에 비행기를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래서 처음 외국 초청을 받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허사가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서독에 특사를 보내 우리나라는 비행기가 없으니 서독 에서 비행기를 좀 보내줄 수 없겠는지 부탁을 한 것입니다. 고맙게도 독일 정부는 그때 독일에서 홍콩을 거쳐 일본을 왕래하는 루프트항공 일반 여객기 를 서울에 일부러 들려서 우리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오도록 조치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행기는 홍콩·방콕·뉴델리·카라치·로마를 거쳐서 28시간 만에 1964년 12월7일 서독 쾰른공항에 도착 했고,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의 영접 을 받았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말이 국빈방문이지 대통령 숙소는 10평도 안 되고 수행원들은 아침에 샤워를 하면 샤워값을 별도로 내면서 여관방 같은 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도로에 걸린 태극기도 불과 20여 개밖에 없고, 말로만 듣던 독일의 근검한 정신을 새삼 나는 느끼게 되었습니다. 차관 교섭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억5000만 마르크를 빌리기로 내부 합의를 했는데 절차상 국제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용도가 없는 우리나라 에 지급보증을 써 준다는 나라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궁여지책 이지만 독일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사가 받는 월급을 1개월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당초 한국이 요구한 금액 보다도 많은 3억 마르크 를 차관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당시 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연간 약 5000만 달러였습니다 여기 교포들 중에 서독 광부로 간호사로 다녀 오신 분 중에 그때 제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이 분들이 서독에 가서 고생한 덕택으로 얻은 차관이 종자돈이 되어서 가난했던 우리나라 경제를 재건하게 된 기초가 된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이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시다.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 하기 위해 함부론 탄광회사 방문 그리고 12월10일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 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헤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독일 함브론 탄광회사를 방문 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광부와 간호사 250여 명은 양복과 한복을 깔끔히 차려 입고 뒤스부르크 교외의 타운홀을 가득 메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애국가 반주가 울려 퍼지자 ‘대한사람 대한 으로 길이 보전하세’란 마지막 대목에서 여기 저기서 흐느끼기 시작 했고, 대통령도 옆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지하 1000m까지 파고 들어가 뜨거운 지열을 받아 얼굴이 새까맣게 탄 우리 형제들, 그리고 이국만리 타국 변두리 시골병원에서 덩치가 큰 시신들을 알코올이 묻은 가제로 시신을 이리저리 딩굴리며 닦고 있는 어린 간호사 우리 딸들의 얼굴을 본 박정희 대통령 은 벅차오르는 가난의 설음에 미리 써 가지고 온 연설문은 꺼내지도 못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열심히 합시다.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도 서독의 라인강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냅시다.” 우리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서독 루브케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우리 대통령을 도와 주십시오. 우리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렇게 광부·간호사· 육영수 여사·대통령이 한데 엉켜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옆에 있는 서독 루브케 대동령은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우리 대통령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세계 역사에 일국의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동포들을 얼싸않고 이렇게 울었던 이야기는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 영부인 옷자락을 붇들고 우리 대통령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울며 놓아주지 않은 광부·간호사를 겨우 떨치고, 차에 올라 숙소로 가는 중에 대통령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옆에서 루프케 서독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계속 우리 대통령 눈물을 닦아 주면서 “이제 그만 우세요. 각하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우리 독일 국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필자는 가난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했던 젊은 박정희 대통령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8일 에르하르트 서독총리와 회담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정신과 나라를 재건하려는 절절한 애국심에 감명을 받은 에르하르트 총리는 서독의 경제를 부흥시킨 경험을 토대로 몇가지 조언을 하게 됩니다. “내가 경제장관을 할 때 한국을 두 번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 발전이 어렵습니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합니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깔았습니다.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차 폭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판이 있어야 하는데 제철 공장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료도 필요하니까 정유 공장도 있어야 합니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경제고문을 보내주겠습니다. 그리고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도 프랑스와 16번을 전쟁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한 황금 같은 지혜와 경험을 우리 대통령한테 이야기 하면서 당초 우리가 요구 했던 금액보다 더 많은 3억 마르크 차관을 조건 없이 제공하겠다는 약속 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 국민은 이 고마움을 앞으로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캐딜락을 타고 160㎞ 속도로 달렸습니다.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를 타고 가다가 2번이나 중간에서 차를 세우고 내려서 무릅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비볐습니다. 장기영 부총리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도 울면서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독일 농촌은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도 잘 정돈된 정원도시 였습니다. 뛰엄뛰엄 보이는 농가는 마치 별장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대통령은 이것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하고 무릅을 쳤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렇게 농촌을 가꿔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에서 에르하르트 총리의 경험담과 충고로 경부고속도로를 깔고 포항제철공장을 짓고 정유 공장을 짓고, 원수로만 여기고 있었던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해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아내고, 새마을운동을 시작해서 농촌을 근대화 시켰습니다. 독일은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이래 처음으로 돈을 꾸어준 나라이며,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서 부강한 나라를 만든 에르하르트 총리의 층고를 받아서 종자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던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서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 서독방문 수행을 마치고 청와대에 돌아와서, 필자가 보고 느낀 기적 같은 일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행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기행문을 국회에 보내 회보에 실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이 기행문을 읽고 눈물을 흘린 의원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코 우리는 독일정부와 국민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난에 찌들은 우리 나라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려 부강한 나라를 만드신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탄신일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그분의 업적과 애국정신을 가슴으로 추모하는 바입니다. 민족중흥회 양재윤 박사 ******************************************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글을 읽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각하 만세~~!! 우리 대한민국 만세~~!! - 2026.09.12(토) 광주 금녕교실에서 손 크라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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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11일 전

국정원 직원 미국 비자 거부에 이어서 국정원장 이종석이의 입국거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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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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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은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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